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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생활이지만 한번도 실망과 웃음을 잃어본 적이 없다. 갖은 역경과 고난의 가시밭길을 헤치면서 인정과 성실, 인내로써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그녀는 여섯 식구의 생계를 맡아 고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훌륭한 며느리로서 착실한 아내로서 자상한 어머니로서 모범적인 행동을 실천하고 있다.
국민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그녀는 23살 때 운전사인 김석근(金石根)씨와 결혼, 행복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다섯 살 위인 남편은 가난한 집에 시집 온 그녀를 격려하면서 끔찍히도 아껴주었다.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미래의 생활 설계로 부풀었던 꿈 많은 신부는 남편의 자상함에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환갑을 넘긴 62세의 시어머니를 정성 들여 시중들고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 집안일을 돌보는 것이 그녀의 신혼 시집 생활이었다.
꿈 많던 소녀 시절의 행복 던 설계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가슴 부푼 희망 속에서 가난한 시집이지만 알뜰히 살림하면서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했다. 남편의 적은 월급을 아껴서 저축을 계속했다. 차츰 불어나는 살림에 시어머니도 남편도 모두들 기뻐하면서 며느리의 알뜰한 살림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난하나마 단란한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남편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앓아 눕게 되었다. 며칠간 고열로 앓던 남편이 갑자기 두 눈을 잃었다. 결혼 3년 만에 당한 불행이었다.
갑자기 당한 충격에 그녀는 살길이 암담하기만 했다. 여러 날 잠 못 이루며 눈물로서 지새워야 했다. 신혼의 행복 된 설계가 남편의 실명으로 산산이 깨어져 버렸지만 그녀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노모와 남편 그리고 젖먹이 아이들을 위해 꿋꿋이 살아가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남편이 못 이룬 복된 설계를 어떠한 시련이 닥치더라도 자신이 꼭 이루겠다며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맨 처음 시작한 일은 남의 집 농사일을 거들어 주는 품일이었다. 농사일이 이처럼 힘들고 하기 어려운 줄은 미처 몰랐던 그녀는 온몸이 쑤시고 아파도 쉬지 않고 끈기있게 계속했다.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남편, 나이 많은 시어머니 그리고 젖먹이 아들이 눈앞에 아른거릴 땐 몸의 통증도 몰랐다.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한 그녀는 노모와 남편 자녀들의 밝은 내일을 기대하며 이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기로 마음가짐을 새로이 했다.
농사철이 지나면 공사장에서 또 남의 세탁 일을 맡으면서 돈이 되는 일이면 아무리 험한 일이라도 가리지 않고 하는 동안 집안 살림을 어느 정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자신은 굶으면서도 시어머니와 남편에게는 언제나 정성을 다해 쌀로 밥을 지어드리고 제반 걱정을 잊도록 하는 등 온갖 배려를 다해 왔다.
남편의 회복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갖가지 약을 구해다 쓰기도 하고 하느님께 애원의 기도를 드리기도 여러 번 그러나 남편은 조금도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영영 불구자가 되어 집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일생을 남편의 평생 지팡이로써 수족이 되어 받들고 노모를 극진히 모시면서 아이들을 훌륭히 키우겠다는 결심으로 중노동을 가리지 않았다. 이러한 정신으로 물질적인 궁핍한 생활을 근근이 이어가던 중 두 자녀를 더 두게 된 그녀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지기만 했다. 고통과 괴로운 나날을 보내면서도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은 자신의 보람이요 생명이었다.
나이 많은 시어머니는 아이들조차 볼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쇠약하고 노환으로 자주 병석에 누워 며느리의 간호를 받아야만 회복되곤 했다. 손발이 닳도록 일한 댓가로 시어머니의 약을 지어 달여 올리고 밤을 새워 간호하고 나면 피로가 겹쳐 코피를 쏟지만 또다시 일터로 나가야 한다.
늙으신 노모와 앞 못 보는 남편을 좀 더 편히 모시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매일 규칙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갖기를 원했다.
품일을 할 경우는 고정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점과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매달려 일을 함으로서 집안을 돌볼 수 없는 점이 늘 아쉬웠기 대문이다.
수소문 끝에 의성면에 있는 태성제사에 공원으로 취직이 되었다.
하루 8시간의 힘든 노동이지만 일이 끝나 귀가하면 시어머니와 남편의 시중을 들고 아이들을 뒷바라지할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직장에서도 마음씨 좋은 언니와 누나로 불리우는 그녀는 비록 적은 월급이지만 여섯 식구의 생활비와 자녀들의 학비를 부담하고도 근검 절약하는 자세로 적으나마 저축을 하고 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어른들이나 동네 사람들에게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인사성이 밝았으며 고된 일을 보람으로 삼고 무슨 일이든 성실히 하는 자세는 많은 읍민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결혼한 지 만 9년. 71세인 노모를 비롯 여섯 식구를 위한 고난의 십자가는 무거워도 이를 기꺼이 극복하고 효와 열의 깊은 정신으로 살아가는 그의 행동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74년 의성청년회의소 회장으로부터 효행표창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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