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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일씨(秋聖一氏)는 가난 때문에 겨우 국민학교(國民學校)밖에 못 나왔지만, 그가 뿌린 효(孝)의 씨앗은 알찬 열매로 영글어 마을 전체(全體)에서 커다란 화제(話題)가 되고 있다.
추씨(秋氏)가 길머져야 할 짐들은 너무나 많았다.
두 다리가 불구(不具)인 부친(父親)의 봉양(奉養), 앞 못 보는 맹인(盲人) 고모(姑母)를 보살펴 드리는 일, 그리고 노모(老母)와 어린 동생도 그가 짊어지고 가야할 무거운 짐이었다.
그의 부친(父親)은 20년전(年前)부터 불치(不治)의 병(病)으로 두 다리를 못쓰게 되었는데, 이 병(病)으로 인(因)해서 가산(家産)을 모두 탕진(蕩盡)할 만큼 그는 오랜 병고(病苦)에 시달려 왔다.
따라서 맏아들인 추씨(秋氏)가 700여평(餘坪)의 적은 농토(農土)를 가꿔 오면서 아버지 대신(代身) 가장(家長) 구실을 해 왔다.
하루가 다르게 쪼들려 가는 가난을 이기기 위해 추씨(秋氏)는 남의 집 품팔이로 나섰고, 그의 어머니는 산나물과 채소를 시장(市場)에 내다 팔면서 근근 입에 풀칠을 해 왔으며, 하루 일을 헛탕치고 집에 돌아오는 날은 모자(母子)가 서로 부둥켜안고 가난을 원망(怨望)하면서 울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불구(不具)인 아버지에게는 그와 같은 표정(表情)을 손톱만큼도 내색(內色)하지 않고, 때로는 손이 되어 주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발이 되어 드리기도 하는 등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했다.
뿐만 아니라 맹인(盲人)인 탓에 결혼(結婚)도 못한 고모(姑母)를 위해서는 눈이 되기도 하고 지팡이가 되기도 하면서 불편(不便)한 일이 없도록 보살펴 주었다.
비록 가난하고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環境) 속에서 살고는 있지만, 추씨(秋氏)는 불구(不具)인 부친(父親)과 고모(姑母)가 정신적(精神的)으로나마 낙담(落膽)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수시(隨時)로 맛있는 음식(飮食)과 깨끗한 옷을 입도록 하는 데 세심한 신경(神經)을 쓰면서 살아왔다.
술과 담배를 일절(一切)삼가고 있는 추씨(秋氏)는, 700여평(餘坪)의 농토(農土)에다 포도(葡萄)를 가꾸면서 새로운 생활설계(生活設計)를 꾸며 나갔다.
이제 그의 힘으로 동생을 고등학교(高等學校)까지 진학(進學)캐 했고, 대학(大學)까지 보내고야 말겠다는 것이 추씨(秋氏)의 간절한 꿈이기도 했다.
남달리 근면성실(勤勉誠實)한 그는, 마을에서도 믿음직스러운 청년(靑年)으로 사랑을 받고 있으며, 특(特)히 마을가꾸기 사업(事業)이 있을 때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열심히 땀흘려 일하는 등 애향심(愛鄕心)도 두터웠다.
남달리 충효사상(忠孝思想)이 강(强)한 그는, "충효정신(忠孝精神)은 우리 조상(祖上)들이 오랜 세월(歲月)을 거쳐 피와 땀으로 갈고 닦아 우리에게 물려 준 유산(遺産)이며 값진 보배다."라고 말하는 추씨(秋氏)는, 효자문(孝子門)이나 효녀문(孝女門)을 세웠던 옛날의 효행(孝行)을, 오늘날 우리도 본받아야 한다고 열(熱)을 올리는 유교정신(儒敎精神)의 투철(透徹)한 수호자(守護者)이기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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