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18세(歲)에 결혼(結婚)한 정순기(鄭順琪) 여사(女史)는 2년 후(年後) 시모(媤母)님이 별세(別世)하는 바람에 20세(歲)의 젊은 나이로 7인가족(人家族)을 이끄는 주부(主婦)가 되었다.
장남(長男)이 객지(客地)에 나가 있는 탓으로, 차남(次男)인 정여사(鄭女史) 부부(夫婦)가 장남(長男)구실을 하면서 쪼들리는 가계(家計)를 이끌어갔으며, 아울러 만성위장병(慢性胃腸病)으로 병석(病席)을 자주 찾는 시부(媤父)님 봉양(奉養)도 정여사(鄭女史)가 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3명(名)의 시(媤)동생과 시(媤)누이를 위해서도, 그들의 어머니 역할(役割)을 해야 하는 등 그의 손길은 무척 바쁘기만 했다.
더우기 시부(媤父)님은 면도칼처럼 신경(神經)이 몹시 날카로워 좀처럼해서 비위를 맞출 수가 없었지만, 정여사(鄭女史)는 시부(媤父)님이 아무리 무서운 폭언(暴言)을 퍼부어도 아무 말 없이 무조건(無條件) 순종(順從)하는 것으로 일관(一貫)하였다.
생식(生食)이 위장병(胃腸病)에 좋다는 말에, 꼬박 3년(年)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쌀과 좁쌀가루를 복욕(服用)도록 뒷바라지를 했고, 영양관리(營養管理)를 위해서도 매일같이 육류(肉類)와 계란과 우유 등을 마련해 드리는 등, 경제적(經濟的)으로 힘겨운 일도 아무런 불평(不平)없이 해 왔다.
또한 위장병(胃腸病)에 특효(特效)라는 이런저런 온갖 약(藥)을 구(求)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하기도 한 정여사(鄭女史)는 그 자신(自身)이 구환(救患)에 지치고 지쳐서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단 하루도 자리에 눕는 일 없이 어제도 오늘도 좋은 약(藥)을 찾아서 두루 사방(四方)을 헤매었다.
그러나 백약(百藥)이 무효(無效)인지 2년전(年前)부터 병석(病席)에서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야 할 만큼 시부(媤父)님의 건강(健康)은 좀처럼 회복(回復)되지 않았다.
시부(媤父)님의 병환(病患)이 악화(惡化)되어 갈수록 정여사(鄭女史)의 손길은 더욱 바빠졌고, 구환(救患)하는 그의 정성(精誠)도 더욱 두터워만 갔다.
그의 효성(孝誠)이 오죽 지극(至極)했으면, 까다롭기 한(限)이 없던 시부(媤父)님도 눈에 이슬이 맺히면서 이와 같이 말을 했을까.
"아가야 내 나이 지금 83세(歲)인데 내가 이만큼 장수(長壽)하고 있는 것이 모두 너의 지극(至極)한 효심(孝心)탓이니라, 내 목숨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내 저 세상(世上)에 가서도 너를 다시 며느리로 맞아 들이고 싶구나, 그래도 괜찮냐, 아가야?"
시부(媤父)님의 이 말에 정여사(鄭女史)는 더욱 콧날이 시큰해지면서 시부(媤父)님의 손을 꼭 잡아 드렸다.
철도공무원(鐵道公務員)인 남편(男便)의 많지 않은 월급(月給)으로 시(媤)동생과 시(媤)누이들을 모두 성혼(成婚)시킨 정여사(鄭女史)는 슬하(膝下)의 장남(長男)이 고등학교(高等學校) 교사(敎師)로, 그리고 차남(次男)은 대학교(大學校)에 재학(在學)하리 만큼, 이제 그의 생활(生活)도 차츰 햇볕을 보고 있다.
오늘만 해도 시부(媤父)님은 이부자리를 대소변(大小便)으로 얼룩지게 했지만, 그것을 본 정여사(鄭女史)는 오히려 입가에 미소(微笑)를 지으면서 미안(未安)해 하는 시부(媤父)님의 표정(表情)을 웃음으로 바꿔 놓았다.
"아버님예, 참말로 그림 잘 그렸읍니더, 이부자리에다 그려 놓은 그림은 이 세상(世上)에서 이것하나 뿐일 거라예, 호호"
친정(親庭)아버지와의 사이라도 이렇게 화목(和睦)할 수는 없으리라.
- 이전글제26회 독행상(篤行賞) 김숙자(金淑子) 25.05.19
- 다음글제26회 독행상(篤行賞) 추성일(秋聖一) 25.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