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김숙자(金淑子)

페이지 정보

본문

제26회(1983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고령군 운수면
효부(孝婦) 김숙자(金淑子) 49세

김숙자(金淑子) 여사(女史)는 평소 온후(溫厚)하고 정숙(貞淑)산 성품(性品)을 지녔으며,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가사(家事)를 도우면서 살아왔다. 평소 김여사(金女史)는 

자녀(子女)들에게 "이름난 가문(家門)과 높은 종족(宗族)을 살펴보면, 이들의 성가(成家)함이 모두 조상(祖上)들의 충심(忠心)과 효도(孝道)와 근검(勤儉)으로부터 이루어지지 아니한 경우가 없었으며, 자손(子孫)들이 모질고 조잡하며 경솔(輕率)하고 사치(奢侈)스럽고 오만(傲慢)한 것으로 인(因)하여, 그 성세(成勢)가 무너지지 아니한 경우가 또한 없었느니라, 모름지기 이루는 것은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이 어렵고, 무너뜨리는 것은 볏단을 불로 태우는 것과 같이 쉬우니라." 

이와 같은 말로 타이르면서, 무엇보다 효(孝)의 참뜻을 알고 또한 이를 어김없이 실천(實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훈(家訓)처럼 말하며 살아왔다. 

사실(事實) 아닌게 아니라 김여사(金女史)는 말보다 실천(實踐)하는 사람으로서, 그 자신(自身) 자녀(子女)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일을 해 왔으니, 그것은 다름아니라 지금껏 10년(年) 동안 중풍(中風)으로 병상(病床)에 누워 있는 시모(媤母)님의 극진한 봉양(奉養)이었다. 

하루 몇 차례에 걸친 용변처리(用便處理)는 말한 나위도 없지만, 아침저녁으로 세수(洗手)를 시키고 더렵혀진 옷과 이불을 깨끗이 세탁(洗濯)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의 따뜻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어디 그뿐이랴, 해마다 시모(媤母)님 생신일(生辰日)에는 동리노인(洞里老人)들을 초청(招請)하여 시모(媤母)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남편(男便)마저 병상(病床)에 눕는 바람에 김여사(金女史)는 여가장(女家 長) 구실을 하면서, 시모(媤母)님과 남편(男便)의 병(病)구완을 해야만 했고, 또 한편으로는 아홉 식구(食口)의 생계(生計)를 위해서 손에 닥치는 대로 날 품팔이를 해 오면서 어려운 역경(逆境)을 이겨 나갔다. 

그의 정성(精誠)이 얼마나 가상(可賞)했던지 인근(隣近) 주민(住民)들의 칭찬(稱讚)이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환자(患者) 곁에 지켜 앉아서 밤을 꼬박 새우는 일이 하루 건너 한 번일 만큼, 그 아주머니의 지극(至極) 정성(精誠)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있을 거요, 세상(世上)에 그래, 시부(媤父)님과 남편(男便)의 보신(補身)을 위해서 한밤중에 냇가에 나가서 물고기와 가재를 잡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요?" 

이렇듯 김여사(金女史)는, 효(孝)에 대해서만은 철저(徹底)한 욕심(慾心)장이었다. 

한낮에 품팔이 일을 하다가도 집으로 달려가, 시모(媤母)님과 남편(男便)의 치닥거리를 끝낸 다음에야 다시 작업장(作業場)에 돌아와 일하는 김여사(金女史)는 누가 보나 효(孝)의 참 실천자(實踐者)였다. 

어려운 환경(環境) 속에서도 6남매(男妹)의 자녀(子女)들을 훌륭하게 키우고 있는 김여사(金女史)는, 자녀(子女)들에게 외출(外出)을 할 때는 반드시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을 실행(實行)에 옮기도록 가르칠 만큼 그의 예의범절(禮儀凡節) 또한 빈 틈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