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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男便)이 사육(飼育)하는 양돈사업(養豚事業)을 도우면서 시모(媤母)님의 구환(救患)을 정성(精誠)들여 해 오고 있는 손애자(孫哀子) 여사(女史)는 마치, 전통적(傳統的)으로 효행(孝行)에 돈실(篤實)했던 옛날 우리네 할머니들의 분신(分身)을 연상(聯想)케 할 만큼, 그의 지극한 효심(孝心)은 하늘도 감동(感動)할 정도였다.
1981년(年)부터 반장직(班長職)까지 맡고 있는 손여사(孫女史)는, 북구청(北區廳) 관내(官內)에서도 모범여반장(模範女班長)으로 명성(名聲)이 자자한테, 특히 이웃 돕기 운동(運動)이 전개(展開)될 때마다 누구보다도 솔선(率先)해서 시범(示範)을 보이기도 했고, 반상회(班常會)도 삼석솔(參席率)이 100%일 만큼 '또순이 반장(班長)'으로 알려진 사람이 바로 손여사(孫女史)였다.
특히 그는 효부(孝婦)로서 더 많이 알려졌는데, 지난 1976년(年)부터 중풍(中風)을 앓고 있는 80 고령(高齡)의 시모(媤母)님을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성(至誠)껏 구환(救患)해 왔다.
그가 얼마나 정성(精誠)들여 구환(救患)을 했는지 어려운 중풍(中風)이 몇 년후(年後)에 완쾌(完快)의 기쁨을 맛보게 되어, 그 후(後) 4년여(年餘) 동안은 아무런 말 없이 건강(健康)을 잘 지켜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워낙 고령(高齡)인 탓일까. 그 후(後) 1982년(年) 3월경(月頃)부터 그 중풍(中風)이 재발(再發)했는데,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달리 수족(手足)도 자유(自由)스럽지 못한 반신불수(半身不隨)여서, 대소변(大小便)도 받아 내야만 했고 밥도 한 술 두 술씩 떠먹여 드려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간혹 노망기(老妄氣)까지 부리면서 손여사(孫女史)의 마음을 어둡게 했지만, 그는 조금도 짜증을 내거나 싫은 표정(表情)을 짓지 않고 항상(恒常) 웃는 얼굴로 한결같이 봉양(奉養)했다.
그의 정성(精誠)이 얼마나 지극(至極)했던지 어느 인근주민(隣近住民) 한 사람은, "손여사(孫女史)가 시모(媤母)님 대소변(大小便)치닥거리하는 것을 몇 번 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손여사(孫女史)의 얼굴 표정(表情)은 평화(平和)의 상징(象徵)인 모나리자의 미소(微少)와 같았다."고 말하면서 그 여(女)야말로 핵가족시대(核家族時代)에 보기 드문 효부중(孝婦中)의 효부(孝婦)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40여두(餘頭)의 돼지사육(飼育)을 위해서 남편(男便)은 매일같이 리어카를 끌고, 이곳 저곳 음식점(飮食店)을 순회(巡廻)하면서 음식(飮食)찌꺼기를 수거(收去)하여 왔는데, 간혹 남편(男便)의 일손이 바쁠 땐 손여사(孫女史)가 직접(直接) 리어카를 끌고 고된 하루 일과(日課)를 메꿔 나가기도 하였다.
그 어머니에 그 자녀(子女)들이라고나 할까, 그의 자녀(子女)들도 그 녀(女)의 효심(孝心)을 닮아 자녀(子女) 셋 모두 '꼬마효자(孝子)'·'꼬마효녀(孝女)' 구실을 유감(遺感)없이 다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하루는, 마침 손여사(孫女史)가 잠시 집을 비웠다가 외출(外出)에서 돌아와 보니, 어린 자녀(子女)들이 합심(合心)하여 할머니의 대소변(大小便)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는 것 하나만 보아도, 이들 자녀(子女)들의 갸륵하고 아름다운 효심(孝心)을 한눈으로 알 수 있다.
국민학교(國民學校) 3학년(學年)을 중퇴(中退)한 손여사(孫女史)는, 자녀교육(子女敎育)에도 남다른 열정(熱情)을 쏟고 있으며, 가훈(家訓)으로는 "충·효·예(忠·孝·禮)의 세 글자를 자녀(子女)들에게 가슴깊이 심어 주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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