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박혜숙(朴惠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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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1983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대구직할시 동구 신천동
효부(孝婦) 박혜숙(朴惠淑) 35세

직유공장(織維工場) 공원(工員)인 김성근씨(金成根氏)와 결혼(結婚)한 박혜숙(朴惠淑) 여사(女史)는, 시모(媤母)님을 모시고 시(媤)동생과, 시(媤)누이 등 5명(名) 가족(家族)이 단간(單間)이 세방(貰房)에서 가난에 쪼들리면서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박여사(朴女史)의 불행(不幸)은, 그가 결혼(結婚)한지 1년(年)만에 발생한 남편(男便)의 교통사고(交通事故)로 싹트기 시작했다. 직유공장(織維工場) 종업원(從業員)으로 일하던 남편(男便)이 기동불능상태(起動不能狀態)에서 꼬박 1년(年)동안 누워 있는 바람에, 자연 실직(失職)이 됐고, 이에 따라 생계(生計)도 위협(威脅)을 받게 됐다. 

시(媤)동생을 비롯한 시(媤)누이들도 직업(職業)이 없었던 탓으로, 생활(生活)은 하루를 더해 갈수록 쪼들어만 갔고 따라서 남편(男便) 치료비(治療費)와 부채(負債)등은 하루가 다르게 솜사탕처럼 부풀어만 갔다. 

"안되겠다. 내가 발 벗고 나서야지, 이대로 앉아 있다가는 깡통 차겠다." 

박여사(朴女史)는 이와 같이 비장(悲壯)하게 결심(決心)한 후 다음 날부터 화장품(化粧品) 외판원(外販員)으로 활약(活躍)했다. 

남달리 근면성실(勤勉誠實)한 그는 지금까지 꼬박 8년(年) 동안 근무(勤務)해 오면서 가계(家計)를 알뜰히 꾸려 나갔다. 

그러나 옥(玉)의 티라고나 할까 말없이 열심(熱心)히 살아가고 있는 그에게, 시모(媤母)님은 이러쿵 저러쿵 간섭(干涉)도 많았고 인정사정(人情事情)없이 무슨 일이나 혹독(酷毒)하게 시키는 바람에 박여사(朴女史)는 남몰래 눈물지을 때도 많았지만, 지금껏 단 한 마디의 대꾸도 없이 시모(媤母)님 말이라면 무조건(無條件) 순종(順從)해 왔다. 

어떻게 보면 그의 시모(媤母)님은 그가 시집살이할 때에 겪었던 앙갚음을, 며느리인 박여사(朴女史)에게 퍼붓는 것 같아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는 일절(一切) 그런 내색(內色)을 하지 않고 순종(順從)의 미덕(美德)을 지켜 나갔다. 

그러던 중 1979년(年) 어느 날, 시모(媤母)님이 실족(失足)하여 척추(脊椎)가 부러지는 뜻하지 않은 사고(事故)로 입원(入院)하게 됐다. 

엄청난 입원비(入院費)로 인해(因)해 1개월(個月)만에 퇴원(退院), 그 날부터 집에서 구환(救患)을 해야만 했다. 

대소변(大小便)도 받아내고 밥도 떠먹여 드려야 하는 고역(苦役)으로 말미암아, 화장품(化粧品), 외판원(外販員)도 그만두고 꼬박 시모(媤母)님 곁에 지켜 앉아서 간병(看病)에만 전념(專念)했다. 

특히 전신마비(全身痲痺)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꼬박 밤을 새워가면서 전신(全身)맛사지를 하는 등 박여사(朴女史)의 정성(精誠)스러운 간병(看病)은, 그렇게도 완고(頑固)했던 시모(媤母)님을 마침내 울리게 하였다.

"아가야 이 시어머니를 용서(容恕)해 다오, 네 은혜(恩惠)는 죽어도 잊지 못하겠다." 

박여사(朴女史)의 손목을 덥썩 잡고 감사(感謝)에 겨운 눈물을 흘렸던 그의 시모(媤母)님은, 마침내 1년여(年餘)만에 병(病)의 차도(差度)를 보여 오늘날에 와서는 바깥 나들이를 할 수 있을 정도(程度)로까지 호전(好轉)되어 기쁨을 만끽(滿喫)하고 있다. 

시모(媤母)님의 병(病)이 가벼워짐에 따라 한 때 중단(中斷)했던 화장품(化粧品) 외판원(外販員)으로 다시 나선 박여사(朴女史)는, 오늘도 시가(媤家)를 위해 고생(苦生)을 낙(樂)으로 생각하면서 묵묵히 효행(孝行)을 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