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이영구(李永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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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1983년 4월 18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경북 성주군 선남면
효자(孝子) 이영구(李永丘) 23세

우리는 흔히 인습과 전통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둘 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관습이나 풍습임에는 틀림없지만, 전자가 나쁜 폐단이 있어 현대에는 잘 맞는 않는 것들이라면, 후자는 현대의 생활에도 의미, 효용이 있는 훌륭한 문화적 유산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조들의 유산들 중에서 인습은 하루바삐 청산해야 하며, 그 대신 전통을 찾아내어 갈고 닦아 후손에 물려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 민족이 대대로 전해 오는 관습이나 풍습 중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것을 이어받아야 함은 물론, 또한 자손만대에 물려주어야 할 으뜸가는 전통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효사상(孝思想)을 우리 민족의 으뜸가는 전통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물질적인 면에서 우리보다 더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 서양인들도 우리의 효경사상에는 감탄을 하고, 그들이 이러한 좋은 정신을 가지지 못함을 부끄러워한다고 한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이 드신 분들을 극진히 모시는 일에 마음을 아끼지 않음은 물론, 주변에서 효경을 남달리 실천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널리 알리는 일이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물질문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조상들이 물려 준 미풍양속을 보전, 계승하기 위해서 중요한 일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영구군은 성주군 선남면 신부동에서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조반석죽(朝飯夕粥)도 어려운 빈곤 속에서나마, 서로를 아끼면서 그런 대로 단란한 살림을 유지해 나갔다. 이군의 가정은 1973년 그가 13세 되던 해 5월 부친의 갑작스러운 별세, 그리고 뒤이은 조모님의 별세로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온후하고 의지력이 강했던 이군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야말로 이제 이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 함을 깨닫고 자신의 힘으로 가정을 이끌어 나가야겠다고 굳게 결심하였다. 이때부터 이군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농사를 가꾸고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는 한편, 공부에도 힘을 쏟아 성주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여러 가지 아픈 기억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죽과 국수로 겨우 끼니를 때우는 어려운 형편이라, 늘 굶주린 배로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밤에는 책을 들어야 했던 일들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군은, 이제부터 가사와 효도에만 전념할 것을 결심하고, 그날부터 자식 잃고 남편 여읜 조부님과 어머님을 위로하고 나이 어린 동생들을 우애로써 보살펴 나갔다. 

그러던 중 이군에게는 또 하나의 시련이 닥쳤으니, 그것은 그의 모친이 중풍으로 쓰러져 자리에 누우시게 된 일이었다. 이군은 모친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명약을 구하고, 병원을 찾아다니며 시봉과 구환에 전력하는 한편, 팔순 조부의 봉양과 어린 동생들의 뒷바라지, 그 외의 집안일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하루 서너 시간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서도, 가중되는 격무와 과로를 오로지 정신력으로 극복하면서, 조부의 봉양과 모친의 병간호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병석의 모친은 아들의 정성 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점점 그 병이 심해지기만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개고기, 쇠고기가 먹고 싶다고 할 때도 있었고, 별다른 이유 없이 짜증을 내거나 소리를 지르면서 꾸짖기도 하는 등, 정신마저 온전치 못할 정도로 병이 깊어졌던 것이다. 

평소 무척이나 자애로 왔던 모친이었기에 이군은 더욱 더 모친에 대하여 지극한 정성을 기울였다. 품삯 일을 해서 고기를 사다 드리기도 하고, 대소변 시중, 오물 빨래는 혼자서 도맡아 처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금도 불평을 하거나 짜증을 내는 일 없이 항상 밝은 표정으로 열심히 가정을 꾸려 나가는 이군의 모습은, 이웃 주민들의 마음을 감복시키기에 충분했다. 

산간계곡에서 얼음을 깨고 오물 빨래를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의 뜨거운 효성심에 감복하면서 눈물을 흘린 이웃 아주머니들도 많았다고 한다. 

지극한 정성과 효성으로 조부님과 모친을 모시고 동생들을 보살피면서 열심히 살아온 지 어언 5년간, 고사리 손이 자라 어느 덧 청년으로 성장했고, 어려운 일들을 도와주던 누나가 혼기에 이르게 되자, 장래를 걱정하여 누나의 완강한 거부를 설득시켜 출가하도록 주선도 하였다. 

가장 다행스러운 일은 금년 83세이신 조부님께서 오늘날까지 별다른 일 없이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계신다는 점이다. 늘 기력이 좋으신 조부님이시기는 하지만, 혹 무슨 불상사라도 생길까봐 이군은 항상 조부님께 정성을 다하고 있는데, 조석으로 문안드리고 시봉(侍奉)하는 한편, 문밖출입이라도 하실라 치면 꼭 따라나서서 조심스럽게 모시곤 하였다.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동생들의 면학에 정성을 기울여, 먼 등굣길에 한 번의 지각도 없도록 해 주었다. 동생 남매들 또한 착하여 학교성적도 우수한 편인데, 금년에 여고를 졸업한 누이동생은 착실한 오빠에게 감화되어 도시로 취직 나가는 것도 포기하고 열심히 집안일을 돕고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듯이 이군의 정성어린 구환과 간병으로, 모친의 병환도 많은 차도를 보이고 있고, 조부님 또한 여전히 노익장을 발휘하시어 이제 이군의 가정에도 따뜻한 봄이 오고 있는 듯하다. 

윤리와 도의가 날로 쇠퇴해 가고 있는 오늘날, 자기 한 몸 간수도 못하여 빗나가는 청소년들이 많은 이때 이영구군과 같은 장한 청소년이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며, 그의 지극한 효성과 우애 그리고 꿋꿋한 의지는 모든 젊은이들 아니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