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이상락(李相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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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문경군 가은읍
선행(善行) 이상락(李相洛) 51세

교편생활(敎鞭生活) 30년(年) 경력(經力)의 이상락(李相洛) 교사(敎師) 그는 오늘도 삼세교육(三世敎育)에 전념(專念)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경로사상(敬老思想) 고취(鼓吹)에도 앞장서고 있는 모범교사(模範敎師)로 화제(話題)의 꽃을 피우고 있는 주인공(主人公)이다. 

그가 남긴 행적(行績)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1979년(年) 추석(秋夕)과 1980년(年) 신정(新正)때는 고향(故鄕)에도 가지 않고 학군내(學群內)의 60세(歲) 이상(以上) 노인(老人) 50여명(餘名)을 일일이 찾아가서 술과 담배와 양말 등 7만(萬)원 상당액(相當額)의 선물(膳物)을 했으며 특(特)히 1980년(年) 5월(月)부터 자신(自身)의 박봉(薄俸)을 절약(節約)하여 매월(每月) 10,000~15,000원씩의 경로기금(敬老基金)을 마을에 기증(寄贈)함으로써 경로기금(敬老基金)을 구축(構築)한 바 있는데, 이에 감동(感動)한 마을 청년(靑年)들이 주축(主軸)이 되어 1981년(年)부터는 자체(自體) 경로기금(敬老基金)을 확보(確保)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계기(契機)가 되어 노인회(老人會)가 발족(發足)됐고, 그 동안 이교사(李敎師)가 꾸준히 기증(寄贈)한 165,000원의 기금(寄金)으로 즐거운 경로(敬老)잔치를 베풀기도 했으며, 이것을 시발점(始發點)으로 매년(每年) 2월(月) 1일(日)을 경로(敬老)의 날로 정(定)하는 등 이교사(李敎師)의 숨은 노고(勞苦)로 경로사상(敬老思想)이 이 마을에 완전(完全)히 뿌리를 내리게 됐다. 

이 밖에도 지난 1980년(年) 7월(月) 집중호우(集中豪雨)로 인(因)해 수재(水災)가 발생(發生)했을 때는 대구(大邱)에서 수재민(水災民)돕기 운동(運動)을 벌여 의류(衣類)) 50여점(餘点)을 모아 수재민(水災民)들에게 전(傳)해주는 한편, 수해복구현장(水害復舊現場)을 찾아가서 음료수(飮料水)와 식량(食糧)을 전달(傳達)하는 등, 지역사회(地域社會)를 위한 봉사(奉仕)에도 심혈(心血)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청소년(靑少年)들의 올바른 성장(成長)을 위해 행락(行樂)철에는 휴일(休日)마다 인근(隣近) 유원지(遊園地)와 계곡(溪谷)등을 찾아 다니면서 청소년선도(靑少年善導)에 힘쓰기도 했다. 

그는 탈선(脫線) 청소년(靑少年)들을 만날 때마다, " 이 세상(世上)에서 가장 아름다울 수도 있고 또한 가장 무서운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유혹(誘惑)에도 빠지기 쉽고 자폭(自爆)하기 쉬운 자기자신(自己自身)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얼굴에 작은 검불만 붙어도 흉이 된다고 얼른 닦아 버리고, 손에 조그만 가시가 박혀도 몹시 불편(不便)하여 없애려고 애쓰면서, 마음의 때와 상처(傷處)는 부끄러워하지도 걱정하지도 않는 상태(狀態)라면, 이보다 더 두려운 자신(自身)의 마음이 어디 있겠는가?" 

이와 같이 훈계(訓戒)하면서 건전(健全)한 양심(良心)을 지니고 살아가는 참된 사람이 되라고 타이르곤 했다. 

학교(學校)에서 그는 인자(仁慈)한 선생(先生)으로서 학생(學生)들의 인기(人氣)를 독차지했는데, 특히 이교사(李敎師)는 가훈(家訓)이 없는 학생(學生)들에게 가훈(家訓)을 손수 지어 주기도 했고, 병(病)으로 결석(缺席)한 학생(學生)이 있을 때는 모든 약속(約束)을 취소(取消)하고 제자(弟子)집으로 찾아가 문병(問病)을 하는 등, 남다른 교육애(敎育愛)도 발휘(發揮)하였다.

평소(平素) 그는 '청소년(靑少年)은 꾸중보다 시범(示範)을 더 필요(必要)로 한다.'는 말로 학생(學生)들을 지도(指導)하고 있는데, 어느 학생(學生)이 귀띔해 준 말 한 마디가 재미있었다.

"이선생(李先生)님은 예, 덮어놓고 잘했다고 칭찬(稱讚)만 해 준답니다. 그래서 별명(別名)을 뭐하고 불렀는지 아는교? '덮어놓고 O.K' 이게 바로 이선생(李先生)님의 별명(別名)이 아닌교"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