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신정식(申正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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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대구직할시 서구 비산동
선행(善行) 신정식(申正湜) 39세

집안이 어떻게나 가난했던지 밥 대신 보리개떡과 소나무껍질을 주식(主食)으로 알면서 살아온 신정식씨(申正湜氏)는, 신문배달(新聞配達) 등 고학(苦學)을 하면서 가까스로 고등학교(高等學校)를 마칠 수 있었다. 

군복무(軍服務)를 무사(無事)히 마친 그는, 약초재배(藥草栽培)를 하여서 생활기반(生活基盤)을 굳건하게 다지게 됐다. 

이제 생활(生活)의 기반(基盤)도 잡혔으나 무엇인가 보람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좋을까?" 신씨(申氏)는 어느 날 혼자서 이와 같이 중얼거리며 길을 걸어가다가 노인(老人)들이 문득 경로당(敬老堂)에 모여서 무료(無聊)하게 시간(時間)을 보내고 있는 곳에 눈길이 멎었다. 

그들을 본 순간(瞬間) 가슴에 찡하게 메아리치는 인간애(人間愛)가 싹트기 시작했다. 

이것이 계기(契機)가 되어 한 달에 한 번씩 어김없이 찾아가 40여명(黎名)의 노인(老人)들에게 약주(藥酒)를 대접(待接)했으며, 1980년(年) 5월(月)의 경로주간(敬老週間)에는 일수노인회(一樹老人會) 회원(會員)을 자택(自宅)으로 초청(招請), 술과 떡을 대접(待接)하고 노인(老人)들의 건강(健康)을 위해 보약(補藥)을 선물(膳物)로 기증(寄贈)하는 등, 40여만(餘萬)원 상당(相當)의 선물(膳物)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해 연말(年末)에도 버선 25켤레, 양말 100켤레, 비누 200개(個) 이 밖에도 감기(感氣)와 몸살약(藥), 해열제(解熱劑) 등 노인건강(老人健康)에 필요한 의약품(醫藥品)을 전달(傳達)하기도 했다. 

또한 부인(婦人)과 더불어 영락양노원(永樂療養院)을 방문(訪問)하여 노인(老人)들의 겨울 감기(感氣) 예방(豫防)을 위한 한약(漢藥) 600명분(名分)을 전달(傳達)하는 등 그의 선행(善行)은 끌이 없었다. 

1981년(年) 9월(月)에는 두 다리가 모두 절단(切斷)되어 불구(不具)가 된 아버지를 돌보며 소녀가장(少女家長)노릇을 하고 있는 중앙국민학교(中央國民學校) 최훈이 양(孃)에게 3만(萬)원 상당(相當)의 학용품(學用品)과 운동복(運動服)을 기증(寄贈)하기도 했다. 

특(特)히 1982년(年) 4월(月)에는 사비(社費)60만(萬)원을 들여 일수경로당(一樹敬老堂) 노인(老人) 12명(名)과 상리동(上里洞) 거주(居住) 노인(老人) 34명(名) 계(計) 46명(名)을 모시고 포항제철(浦項製鐵)을 비롯한 경주(慶州) 보문단지(普門團地), 현대조선소(現代造船所)와 현대자동차공장(現代自動車工場) 등지(等地)에 산업시찰(産業視察)을 겸(兼)한 1일(日) 효도관광(孝道觀光)을 실시하여 이들 노인(老人)들을 기쁘게 해 드리기도 했다. 

"이웃 노인(老人)들은 자기(自己)의 어버이보다 더 소중(所重)하게 생각하면서 1일 효도관광(孝道觀光)의 기쁨까지 안겨주고 있으니, 세상(世上)에 이렇게 고마운 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노인(老人)의 말 그대로 신씨(申氏)의 경로관(敬老觀)은 고개가 저절로 숙여질 정도로 숭고(崇高)하였다. 

남달리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富裕)한 생활(生活)이라고는 못해 본 처지(處地)였지만, 자기(自己)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또한 노인(老人)들에 대해서도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공경(恭敬)하고 있는 신씨(申氏)의 숨은 공적(功績)이 널리 알려져, 1981년(年) 5월(月)에는 대구시장(大邱市場)이 수여(授與)하는 표창장(表彰狀)을, 그리고 1983년(年) 5월(月)에는 보사부장관(保社部長官)의 표창장(表彰狀)을, 이 밖에도 대한노인회(大韓老人會) 비산(飛山)일수지회장(一樹支會長)으로부터 감사장(感謝狀)을 받는 등 그에게 칭송(稱頌)을 보내는 박수(拍手) 소리는 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