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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금연(楊金蓮) 여사(女史)의 결혼생활(結婚生活)은 너무나 불행(不幸)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그 녀(女)는 22세(歲) 때 결혼(結婚)하였는데, 결혼(結婚) 3개월(個月)만에 남편(男便)이 이름 모를 병(病)으로 눕게 되는 바람에, 당장 병원(病院)에 갈 치료비(治療費)도 없는 형편(形便)이어서 결혼(結婚)반지도 팔아야만 했다.
금(金)반지를 팔고 금(金)목걸이도 처분(處分)하여 치료(治療)를 계속(繼續)했지만 남편(男便)의 병명(病名)은 알 길이 없었고, 필경(畢竟)에는 22세(歲)의 꽃다운 아내를 남겨두고 남편(男便)은 눈을 감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絶望感)에 시신(屍身)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며 울어보았지만 죽은 남편(男便)이 살아날 리가 없었다.
장례(葬禮)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양여사(楊女史)는 한(限)없이 몸부림치며 울다가 비장(悲壯)한 각오(覺悟)로 결단(決斷)을 내리려 했다.
'차라리 나도 남편(男便)을 따라 죽어 버리자. 그러나 뱃속에 든 아기는 어떻게 한다?' 그 때 이미 그에게는 뱃속에 3개월(個月)된 남편(男便)의 씨앗이 꿈틀거리고 있었으므로 다시 생각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된다 뱃속에서 태어날 자식(子息)을 위해서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죽은 남편(男便)에게 보답(報答)하는 아내의 길이다.' 이와 같이 다시 마음을 고쳐먹은 양여사(楊女史)는, 임신(妊娠) 3개월(個月)의 몸을 이끌고 시가(媤家)를 찾아갔다.
땅 한 평(坪)없는 시가(媤家)에서는 역시 양여사(楊女史)처럼 27세(歲)때 남편(男便)을 여의고 홀로 살아가고 있는 시모(媤母)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랄까. 서로의 기구(崎嶇)한 운명(運命)을 슬퍼하며 한 동안 부둥켜안고 울기만 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눈물로 세월(歲月)을 보낼 수만은 없어, 다음날부터 양여사(楊女史)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품팔이와 막노동(勞動)을 하면서 시모(媤母)님을 알뜰히 봉양(奉養)했다.
그 날부터 7개월후(個月後) 양여사(楊女史)는 아비 없는 유복자(遺腹子)를 출산(出産)했는데, 그 날도 시(媤)어머니와 며느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만 했다.
보다 못한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이 "새색시, 아까운 청춘(靑春)을 썩히지 말고 새 사람을 찾아서 재혼(再婚)하도록 해요, 스물 두 살 꽃다운 나이에 훤히 내다보이는 고생(苦生)을 사서 할 게 뭐냔 말이예요."
이와 같은 동정(同情)어린 말로 양여사(楊女史)에게 재혼(再婚)을 권(勸)했지만 그 녀(女)는 오직, "시모(媤母)님을 봉양(奉養)하면서 자식(子息)을 훌륭하게 키워 보겠다."는 일념(一念)뿐이라는 말로 이들의 권유(勸誘)를 물리치곤 했다.
그 후(後) 양여사(楊女史)는 품팔이와 삯바느질, 구멍가게와 화장품(化粧品) 외판원(外販員) 등, 손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아들을 훌륭히 키워, 지금은 전문대학(專門大學) 2년(年)을 중퇴(中退)하고 4년제(年制) 정규대학(正規大學)에 진학(進學)할 준비(準備)를 하고 있고,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그의 시모(媤母)님도 양여사(楊女史)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속에 건강(健康)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봉화군수(奉化郡守)로부터 2차(次)에 걸쳐 효부상(孝婦賞)과 열행상(烈行賞)을 받은 바 있는 양여사(楊女史)는, 단 하나뿐인 유복자(遺腹子)를 위해 그의 마지막 정열(情熱)을 불태울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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