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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자(金春子) 여사(女史)는 20세(歲) 때 7남매(男妹) 가정(家庭)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왔는데, 시댁(媤宅)에는 시모(媤母)님은 없고 홀 시부(媤父)님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부(媤父)님을 비롯하여 남편(男便), 그리고 7남매(男妹)에 달(達)하는 시(媤)동생과 시(媤)누이 등 대가족(大家族)이, 단 한 평(坪)의 땅도 없이 가난을 숙명(宿命)처럼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더우기 시부(媤父)님은 연로(年老)한 탓으로 놀고 있는 상태(狀態)였고, 남편(男便)은 소아마비(小兒痲痺)로 불구(不具)가 된 몸이어서 단 한 푼도 벌 수 없는 생활무능자(生活無能者)였다.
결국(結局) 맏며느리로 시집온 김여사(金女史)가 이 집안의 가장(家長)노릇을 해야 하는 딱한 처지(處地)였다.
"여보, 당신 불구(不具)라고 너무 비관(悲觀)하지 말아요. 열심히 일해서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릴 테니 나만 믿어 보세요."
그의 말대로, 김여사(金女史)는 억척스럽게 땀 흘려 일해서 버려진 야산(野山) 1,000여평(餘坪)을 개간(開墾)했다.
씨를 뿌리고 거름도 주면서 결실(結實)의 계절(季節)을 기다렸지만, 첫 해는 홍수(洪水)로, 다음 해는 가뭄으로 김여사(金女史)를 울렸다.
'좌절(挫折)해서는 안 된다. 열매가 맺을 때까지 씨를 뿌려야 한다.'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선 김여사(金女史)는 그 다음 해에는 끝내 참깨 4가마의 수확(收穫)을 얻게 되었고, 또한 돼지 10마리와 염소 50마리를 사육(飼育)하는 기쁨까지 맞게 됐다.
또한 밤에는 가마니짜기와 홀치기 등으로 억척스럽게 땀 흘려 일해서, 마침내 1970년(年)에는 2,000평(坪)의 논도 마련하게 됐고, 그 동안 막내시(媤)동생을 끝으로 6남매(男妹) 모두를 결혼(結婚)시켜 살림까지 마련해 주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불구(不具)인 남편(男便)을 하늘처럼 생각하면서 알뜰히 섬겨 왔으며, 또한 시부(媤父)님도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봉양(奉養)해 왔다.
그 후(後) 시부(媤父)님의 병환(病患) 치료(治療)와 자녀교육관계(子女敎育關係)로 피땀 흘려 마련한 농토(農土)를 모두 시(媤)동생에게 물려 주고 대구(大邱)로 이주(移住), 서문시장(西門市場)에서 손수레를 끌며 행상(行商)을 시작했다.
15평(坪)짜리 아담한 집을 마련할 만큼 그는 억척스럽기만 했는데, 단 하나 시부(媤父)님의 병환(病患)이 그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시부(媤父)님은 기동(起動)을 못하는 중풍(中風)인 탓으로 대소변처리(大小便處理)도 김여사(金女史)의 손을 거쳐야만 했고, 식사(食事)도 그의 손을 빌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는 일 없이 정성(精誠)들여 간호(看護)에 임(臨)하였다.
그러나 끝내 보람도 없이 별세(別世)하고 말았다.
이제 그는 불구(不具)의 남편(男便)을 위해 더욱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손발이 되어 주고 있으며, 그 동안 성장(成長)한 자녀(子女)들도 대학(大學)과 고등학교(高等學校)와 중학(中學)의 순(順)으로 각기(各其) 열심히 공부(工夫)하고 있다.
"권면(勸勉)과 노력(努力)의 줄기찬 여정(旅程)의 종국(終局)에는 반드시 보람 있는 결실(結實)이 맺어진다."고 말하는 김여사(金女史), 누가 보나 그는 '오뚜기 여사(女史)'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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