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신정우(申貞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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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풍군 풍기읍
효부(孝婦) 신정우(申貞雨) 68세

관습(慣習)은 법(法)보다 강(强)하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효심(孝心)이 흐려져 간다고 해서, 뜻있는 사람들이 충효정신(忠孝精神) 재건(再建)에 노력(努力)하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比較)할 때 우리나라는 오랜 관습(慣習)의 강(强)한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효도(孝道)를 다하지 못하면 인간대접(人間待接)조차 받지 못하는 사회분위기(社會雰圍氣)의 일면(一面)이 현재(現在)에도 남아 있으며, 이러한 관습(慣習)은 오랜 전통(傳統)에서 연유(緣由)된 것이지 결(決)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분위기(社會雰圍氣)의 조성(造成)과 그것이 연륜(年輪)을 쌓아 굳건한 관습(慣習)과 전통(傳統)이 되게 함이 중요(重要)하다고 하겠다.

40년간(年間)의 결혼생활(結婚生活)을 통(通)해서 바로 그와 같은 효(孝)의 길이 이어받고, 또한 물려준 갸륵한 효부(孝婦)가 있으니 그가 바로 신정우(申貞雨) 여사(女史)이다. 

효자가정(孝子家庭)에서 자란 신여사(申女史)는 결혼후(結婚後)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는 데 있어서 처녀(處女) 떄 친정(親庭)에서 익히며 실천(實踐)했던 대로 언제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과 함께 순종(順從)의 미덕(美德)을 발휘(發揮)하면서 살아왔다. 

이제 신여사(申女史) 자신(自身)이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할머니임에도 불구(不拘)하고 94세(歲)의 노시모(老媤母)님을 위한 그녀(女)의 정성(精誠)어린 효행(孝行)은 하늘도 탄복(歎服)할 정도(精度)였다. 

더우기 5년전(年前)부터는 노환(老患)으로 인(因)해 대소변(大小便)도 일일이 신여사(申女史)가 받아내야만 했고, 식사(食事)도 한술 두 술씩 떠서 잡수시게 해 드렸는데, 이와 같은 모든 뒷바라지를 조금도 싫은 내색(內色)을 짓지 않고 지금껏 해 오고 있다. 

신여사(申女史)는 자신(自身)도 쌓이고 쌓인 피로(疲勞) 때문에 병상(病床)에 누워야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시모(媤母)님이 누워 계신데 내가 버르장머리 없이 자리에 눕다니? 일하다가 쓰러지는 한(限)이 있더라도 어른들에게 걱정스러운 표정(表情)을 보여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말하면서 자신(自身)에게 다가온 병마(病魔)를 물리치곤 하였다.

신여사(申女史)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나 할까, 아들 역시 지극(至極)한 효심(孝心)으로 신여사(申女史)를 공경(恭敬)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그 녀(女)는 아들에게, "나는 괜찮으니 할머님께 더 신경(神經)을 쓰도록 해라." 이렇듯 자신(自身)보다는 시모(媤母)님께 더 효심(孝心)을 바쳐야 한다고 말하는 신여사(申女史)는, 맛있는 음식(飮食)이 있어도 자식(子息)들과 손자(孫子)들보다는 시모(媤母)님께 먼저 대접(待接)토록 배려(配慮)하는 등, 그의 자상(仔詳)한 마음씨는 언제나 인근(隣近)에서 칭송(稱頌)의 대상(對象)이 되어 왔다. 

"그 자신(自信)도 백발(白髮)의 할머니인데, 할머니가 할머니를 봉양(奉養)하고 있으니 세상(世上)에 이렇게 아름다운 미담(美談)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라는 인근동민(隣近洞民)들의 찬사(讚辭) 그대로, 68세(歲)의 며느리가 94세(歲)의 시모(媤母)님을 극진히 봉양(奉養)하고 있으니, 이 어찌 출천지효부(出天之孝婦)라고 하지 않을 수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