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윤분악(尹粉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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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1990년 4월 20일)
열행상(烈行賞)
경북 영일군 흥해읍
열부(烈婦) 윤분악(尹粉岳) 59세

윤분악(尹粉岳) 여사(女史)는 어렸을 때부터 엄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서 1949년 18세 때에 월성 이씨 가문(家門)의 맏며느리로 출가(出嫁)하였다.

윤여사(尹女史)는 시어머니와 시동생 3명이 있는 가정의 맏며느리로 집안 살림을 맡아오던 중 결혼한 이듬해인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편과 함께 피난가던 도중 포화(砲火) 속에서 남편과 헤어지고 말았다.

뜻밖에 남편과 헤어진 윤여사(尹女史)는 남편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알 길이 없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가세는 기울기 시작했고 윤여사(尹女史)는 연로하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동생 3명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어려운 가계를 꾸려 나가야 했다.

슬하에 자식도 없고 젊은 윤여사(尹女史)에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재혼하라고 권유했지마는 전통윤리를 지키는 가정교육을 받아 그것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는 윤여사(尹女史)는 이를 한마디로 거절하고 40여년 간 수절(守節)하고 있으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지조(志操)를 칭송해 마지 않는다.

그런데, 3년 전부터 시어머니께서 신경통으로 거동이 불편해지자 가세가 빈곤(貧困)하여 약을 구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자기자신도 건강이 좋지 못한데도 산과 들을 헤매며 약초를 구해다가 달여 드리고 지극한 정성으로 병간호(病看護)를 하고 있으므로 8순이 넘도록 장수(長壽)한다고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윤여사(尹女史)의 효행(孝行)을 칭찬하고 있다.

윤여사(尹女史)는 700평 남짓한 농사를 지어 시동생 3명의 뒷바라지를 하고 성혼시켜 분가시키고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데 먼동이 트기 전에 농사일을 하고 오직 시어머니의 병간호에 매달려 모든 정성(精誠)을 다 바치고 있으며 마을 부녀회 활동에도 남달리 성의를 보여 인정 많은 아주머니로 알려져 있다.

19세 때 남편과 생이별(生離別)하고 주위에서 개가를 권유해도 마다하고 슬하에 혈육 한 점 없이 40여년간 수절하면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동생 뒷바라지를 하면서 살아 온 윤여사(尹女史)도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 사망한 것으로 판단하고 제삿날을 정하여 제사를 지내고 명복(冥福)을 빌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윤여사(尹女史)의 열행과 효행은 한국전통윤리(寒國傳統倫理)의 규범이며 모든 사람들의 칭송을 받아 마땅한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