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김순창(金順昌)

페이지 정보

본문

제33회(1990년 4월 20일)
열행상(烈行賞)
경북 영양군 석보면
열부(烈婦) 김순창(金順昌) 68세

김순창(金順昌) 여사(女史)는 어릴적부터 유교적 명문가에서 엄격한 예절교육을 받고 자라서 1943년 부모님의 정혼(定婚)에 따라 출가(出嫁)하였다.

1943년 결혼 당시의 시댁에는 시부모님과 6남매가 전답 몇 마지기로 근근이 호구해가는 가난한 집안이었다.

당시는 일정(日政) 말엽이어서 남편은 결혼한지 8개월만에 일본으로 징용되어 갔고 그때부터 시부모님을 모시고 시동생을 보살피면서 살림을 꾸려가야 하는 김여사(金女史)는 남편이 있을 때보다 더 정성을 들여 시부모님께 조석으로 문안 드리고 시동생의 뒷바라지를 했다.

날마다 정화수(井華水)를 떠 놓고 남편이 무사하게 귀환하도록 축수(祝壽)하고 집안의 화평과 시부모(媤父母)님의 장수(長壽)를 기원했다.

1945년 8월, 조국이 해방되자 남편은 귀국했으나 징용 당시 탄광에서 일할 때 얻은 폐질환(肺疾患)으로 자리에 눕게 되고 이어서 설상가상으로 시아버지께 중풍으로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어 거동이 불능하게 되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김여사(金女史)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병간호를 해야 하는 한편, 쪼들리는 살림에 약을 구하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든지 해야만 했고 8km가 넘는 산길 재를 넘어 약재를 구해다가 지성으로 병구완(病救援)을 했으나 병은 좀체로 회복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1950년 첫째 딸을 홍진으로 잃고 둘째 딸을 낳았으나 4개월 후에 남편은 사망하고 말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김여사(金女史)는 젖먹이 딸을 데리고 시아버지의 병간호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시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결혼까지 시키고 천신만고의 고생을 했지만 아들을 잃은 시부모(媤父母)님의 비통한 심정을 위로하면서 불평하거나 내색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보기 드문 효부(孝婦)이고 열부(烈婦)이다.

그러던 중, 1960년 1월 시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김여사(金女史)의 적막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9순이 넘은 시어머니도 중풍으로 자리에 누워 1년 동안 고생을 하셨는데 김여사(金女史)는 시어머니와 기거를 함께 하면서 환갑이 넘은 자신의 건강은 개의치 않고 약을 구해다가 극진히 시봉(侍奉)하였으나 끝내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死別)하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봉양(奉養)하면서 만난을 극복하고 수절(守節)해 온 김여사(金女史)의 열행은 진정한 한국 여인상(女人像)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