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장분이(張粉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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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1990년 4월 20일)
열행상(烈行賞)
경북 군위군 우보면
열부(烈婦) 장분이(張粉伊) 49세

장분이(張粉伊) 여사(女史)는 장병은씨의 장녀로 태어나 전형적인 유교 가정에서 부덕(婦德)을 닦은 규수(閨秀)로서 1963년 22세 때 오수재씨와 결혼하였다.

시가(媤家)는 가난해서 살림날 때에 한 평의 전답(田畓)도 물려 받지 못했다.

농촌에서 전답이 없으면 자연히 품팔이를 해야 하는데 장여사(張女史) 부부(夫婦)는 합심해서 품팔이, 막노동 등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을 했다.

비록 가난하지만 부모님께 효도(孝道)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부부간의 금슬이 좋기로 소문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에서 출발한 장여사(張女史) 부부는 근검절약 알뜰히 돈을 모아 결혼한지 3년 후 1966년에는 논 300평을 장만하였는데 자기소유의 토지를 마련하게 되어 한없이 기뻤다.

이렇게 살림살이가 늘어나자 가정도 더욱 화목(和睦)하고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난데없이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환란이 닥쳐왔다.

평소에 건강하던 남편이 위장병으로 눕게 되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좋다는 약과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 다녔으나 조금도 차도가 없고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하는 수 없이 병원에 입원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경북대학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불치의 병, 위암으로 판명되어 이미 때가 늦어서 진료마저 거절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장여사(張女史)는 단념하지 않고 남편의 병을 회복시키겠다고 온갖 정성(精誠)의 노력을 다해 보았으나 1971년 4월에 남편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을 잃은 장여사(張女史)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을 삼키면서 어린 자식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남편과 사별(死別)한 서른살의 청춘(靑春)과부(寡婦)를 딱하게 여겨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재혼(再婚)하라고 권했지마는 장여사(張女史)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어찌 그럴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단호히 거절하고 새벽 일찍 일어나 자기집 가사의 농사일을 해놓고 낮에는 날품팔이를 하면서 아이들의 학비를 마련하였고 푼푼이 모은 돈 20만원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구입해서 사육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장남을 고등학교에 보냈고 이어 두 딸들도 고등학교를 졸업시켜 직장 생활을 충실히 하여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장여사(張女史)는 3남매를 모두 착하고 효도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시켰다.

모두가 열부(烈婦)라고 칭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