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김태연(金台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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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1989년 4월 20일)
열행상(烈行賞)
경북 울릉군 울릉읍
열부(烈婦) 김태연(金台蓮) 37세

김태연(金台蓮) 여사(女史)는 경북 의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중 맏딸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살림살이가 너무 어려워서 경기도 평택에서 공장생활을 시작하였다.

어린 소녀이지만 효행(孝行)은 모든 행실의 근본이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월급에서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고향의 어머니에게 송금해서 어린 동생들과 가계를 돕고 있었는데 19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생계가 더욱 어렵게 되어 지금의 남편인 하홍태씨(河洪泰氏)로부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이 인연이 되어 천연두(天然痘)로 비록 눈이 멀고 얼굴은 흉하지만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해 용모 단정한 처녀가 1976년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한 이듬해 김여사(金女史)는 남편의 고향인 울릉도 도동으로 갔으나 시댁(媤宅)도 역시 가난하여 막노동을 하면서 1년 동안 살다가 농촌지역인 사동 속칭「간령」이라는 마을로 이사해서 농촌일의 날품팔이를 햇다.

그러나 눈먼 남편과 두 어린 자식을 먹여 살리기가 힘들어서 끼니를 굶을 때도 있었다.

이러한 사정이 당국에 알려져 1979년에 영세민(零細民)으로 선정되어 정부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1987년 옆집에 살고 있는 시숙(媤叔)이 오징어잡이를 하던 중 선박사고로 노동력을 잃게 되었으니 김여사(金女史)는 실질적으로 두 세대의 가장(家長) 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김여사(金女史)는 이렇게 어려운 역경(逆境)속에서도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한마디 불평 없이 지극정성으로 눈먼 남편 뒷바라지와 시어머니 그리고 시숙의 시중을 들면서 꿋꿋하게 살아왔다.

이 갸륵한 정성을 기리어 1988년 5월 어버이날에 대통령표창을 받기도 했다.

김여사(金女史)의 딱한 사정을 지켜 본 속칭「간령」마을사람들은 그녀에게 소매품 가게를 차리게 해서 겨우 끼니라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김여사(金女史)는 꿈 많고 꽃다운 처녀시절 다른 건강한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었지마는 도움을 받은 정(情)을 못 잊어 희생정신(犧牲精神)으로 눈먼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서 천신 만고 고생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헌신적(獻身的)으로 살아가고 있으므로 울릉도민이 모두 김여사(金女史)의 열행(烈行)을 칭송해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