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김귀례(金貴禮)

페이지 정보

본문

제32회(1989년 4월 20일)
열행상(烈行賞)
경북 영일군 오천읍 문덕도
열부(烈婦) 김귀례(金貴禮) 45세

김귀례(金貴禮) 여사(女史)는 22세 때 홀어머니와 5남매의 장남인 가난한 농부 이윤현씨와 결혼하여 강원도 홍천의 산골에서 화전민(火田民)으로 산을 개간하고 소작농으로 생활하면서 시동생 2명과 시누이 3명을 출가시켰으며 김여사(金女史)도 다섯 자녀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러던 중, 10여년 전에 정부의 화전민(火田民) 이주계획에 따라 농토를 잃게 되자 1979년에 오천읍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농사를 짓던 남편은 특별한 기술도 없고 해서 건설공사 현장에서 막노동으로 일하고 김여사(金女史)도 남편을 도와 날품팔이를 하면서 사글세방에서 시어머니와 다섯 자녀가 불편한 생활을 해 왔다.

가난하고 불편했지만 그런대로 가족끼리 서로 이해하고 내일의 희망(希望)을 안고 살아가던 중, 1986년 10월에 공사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식사 후에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하기에 예사로 알았는데 이튿날 병원에 갔더니 뜻 밖에도 위암이라는 진단이 내렸다.

김여사(金女史)는 눈앞이 캄캄했으나 남편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一念)으로 동분서주(東奔西走)했으나 일가친척이 없는 객지에서 돈을 빌리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보다 못한 이웃사람들의 주선으로 2백만원을 빌려 1986년 12월에 성모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김여사(金女史)는 난생 처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했다.

남편이 살아날 수만 있다면 자신은 어떠한 희생도 달게 받겠다고. 그래서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이 하늘에 사무쳤는지 남편의 수술은 성공했고 병원 측에서는 장기간 약을 복용하고 요양(療養)해야 한다는 진단이 내렸다.

그로부터 김여사(金女史)는 8순의 시어머니와 남편의 병간호(病看護) 그리고 자식들과 먹고 살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직업전선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일자리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포항시내버스 오천 영업소의 청소부 자리를 얻게 되어 월 12만원 정도의 봉급을 받게 되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 늦게 퇴근하는데 비해서 월급이 적지만 일할 수 있음에 감사를 하며 그런대로 지내고 있는데 남편의 위암이 재발한 것이다.

다시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하고 있으나 김여사(金女史)는 남편의 병간호와 직장생활을 해야하는 이중의 고충을 겪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연로(年老)하신 시어머니(媤母)와 남편의 병간호(病看護)를 하고 있는 김여사(金女史)는 효열(孝烈)을 겸비(兼備)한 모범(模範) 주부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