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김필순(金必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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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1989년 4월 20일)
열행상(烈行賞)
경북 영덕군 영덕읍
열부(烈婦) 김필순(金必順) 46세

김필순(金必順) 여사(女史)는 4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효녀(孝女)라는 칭찬을 받으면서 자라나 1967년 25세 때 박해용씨(朴海龍氏)와 결혼했다.

시댁은 재산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집이라 단칸 셋방에서 부부가 열심히 노력해서 모은 돈으로 1984년에 영덕읍내에 조그마한 식육점을 내어 생활 기반을 잡고 장녀는 보건전문대학에, 장남은 고등학교, 차남은 중학교에 보내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왔다.

이렇게 알뜰하고 평온한 가정에 뜻밖에도 1986년 어느 날, 남편이 친구와 사소한 언쟁 끝에 밀고 당기다가 시멘트 바닥에 넘어져 뇌진탕(腦震蕩)을 일으켜 입원하게 되었다.

김여사(金女史)는 입원 중인 남편의 간호에 정성(精誠)을 다하고 병원의 의사들도 최선을 다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식물인간(植物人間)의 상태로 퇴원했으나 산소호흡기(酸素呼吸器)에 의존하는 수 밖에 도리가 없게 되었다.

남편은 평소에 포악한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그날의 운이 나빴던 것이다.

가해자로부터 한 푼의 보상금도 받지 못하고 그 동안의 입원비와 치료비 등을 지불하고 나니 어렵게 마련한 식육점도 처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남 1녀의 학비도 마련해야 하고 당장에 살아나갈 식생활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김여사(金女史)는 동분서주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평소에 마음이 차분하고 남달리 인내심(忍耐心)이 강한 김여사(金女史)는 현대의학(現代醫學)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을 자신의 정성으로 고쳐보겠다고 새벽에 평소에도 다니지 않던 교회에 나가 기도(祈禱)를 올리고 돌아와서는 깨끗이 목욕을 시키고 죽을 끓여 인공급식을 하고 대소변을 받아 내는 등 남편의 병간호(病看護)에 온갖 정성을 다하는 한편, 아무리 고단하거나 날씨가 추워도 여관 등을 찾아다니면서 세탁물을 세탁해주는 날품팔이를 해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김여사(金女史)는 남편이 의식을 회복해서 맑은 정신으로 한번만이라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소원이라며 눈물을 흘리지만 자녀들 앞에서는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는 장(壯)한 어머니이다.

이렇게 2년 수개월을 하루같이 성심성의 지극한 정성(精誠)으로 남군(男君)의 병구완(病救援)을 하고 굳건하게 살아가는 김여사(金女史)의 열행(烈行)은 진정 한국 여성의 사표(辭表)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