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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이(金順伊) 여사(女史)는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학교에서 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어려서부터 예절(禮節)바른 가정에서 자라 예의범절(禮儀凡節)이 몸에 배어 있었다.
19세 때 부모님의 정혼(定婚)으로 최배수씨(崔倍樹氏)와 결혼했으나 시댁도 생활이 어려워 남편을 도와 날품팔이를 하는 등 어렵게 살아왔다.
결혼한지 2년 뒤에 남편이 군에 입대하게 되자 살림살이가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서 김여사(金女史)는 농번기에는 날품팔이를 하고 농한기에는 산에 올라가 약초(藥草)를 채취하고 해서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고 살면서 남편이 제대하기 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태산같이 믿고 있던 남편이 이듬해에 훈련 도중 시력을 잃고 맹인이 되어 돌아왔다.
건강하던 남편이 맹인이 되어 돌아오자 김여사(金女史)는 눈앞이 캄캄했으나 이러한 모든 것이 운명이라고 받아 들이고 남편의 온갖 시중을 들면서 위로했다.
식사의 시중에서 대소변길 안내와 이부자리 봐주기, 나들이 할 것 없이 남편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다.
김여사(金女史)는 자랄 때부터 효행(孝行)이 몸에 배여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시중을 드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날마다 날품팔이를 하고 산나물이나 약초를 캐어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연명해야 하니 몸이 지칠대로 지쳤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굳은 각오로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좌절(挫折)하지 않고 남편의 뒷바라지와 시부모의 봉양(奉養)에 온갖 정성(精誠)을 다했다.
그러던 중, 1967년에 시아버지가 노환(老患)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김여사(金女史)는 새로운 삶을 위해서 매성리 마을 앞에 구멍가게를 내었으나 매성리 부인회에서 공동구판장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구멍가게는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모내기, 논매기, 보리타작, 밭일 등 농사일의 날품팔이와 공사장 등짐을 지는 막노동을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시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3남 1녀의 호구에 급급했다.
그런데 엎어진데 덮친 격으로 시어머니께서 중풍으로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어 거동이 불편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여사(金女史)는 앞 못 보는 남편과 중풍에 걸린 시어머니의 시중을 들면서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이렇듯 딱한 사정을 감안해서 마을 부녀회에서는 공동구판장을 폐쇄하고 구멍가게를 경영하게 했다.
36년이 넘도록 고생하는 김여사(金女史)에게 지내온 세월이 복(福)이 되어 돌아오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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