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이귀남(李貴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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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1990년 4월 20일)
열행상(烈行賞)
경북 금릉군 노마면
열부(烈婦) 이귀남(李貴男) 46세

이귀남(李貴男) 여사(女史)는 어려서부터 철저한 가정교육(家庭敎育)을 받고 자라서 21세 때 김사민씨와 결혼하였으나 시댁은 시어머니와 시동생 그리고 전답 다섯마지기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가난한 가정이었다.

이여사(李女史)는 맏며느리로서 남편을 도와 농사일을 거드는 한편, 어려운 살림에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일이면 아무 일이라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도 불평하거나 내색하지 않고 화목(和睦)한 가정을 이루어 나갔다.

그런데 1979년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어 자리에 눕게 되자 이여사(李女史)는 식사 시중과 대소변을 받아 내는 등 온갖 정성을 들여 병간호를 하고 있는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남편마저 간암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되었다.

이여사(李女史)는 시어머니와 남편의 병간호(病看護)를 혼자서 맡아 해야하고,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하니 몸은 하나 뿐인데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여사(李女史)는 이런 생활을 운명으로 받아 들이고 말없이 11년이나 계속하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중환자(重患者) 두 사람을 혼자서 10년을 넘게 간호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고단한 일임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정성껏 간병(看病)한 보람도 없이 1980년 1월에 남편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여사(李女史)의 원통하고 슬픈 심정은 어디에 비할 바 없었으나 자식을 먼저 보내고 병석에서 신음하시는 시어머니와 자신만 쳐다보고 있는 4남매의 호구지책을 생각할 때 비탄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이여사(李女史)는 다섯마지기의 전답(田畓)으로는 자녀들의 학비를 충당할 수가 없어 날품팔이와 막노동 등 닥치는 대로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렇게 노력해서 알뜰히 돈을 모아 자녀 3명은 고등학교를 졸업시켰고 딸 하나는 출가시켰다.

참으로 장한 어머니라 아니할 수 없다.

게다가 정신질환자인 시동생이 수용소(收容所)에서 요양(療養)하고 있기 때문에 조카들까지 돌보아주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어쩌면 짓궂은 신(神)이 있어 이여사(李女史)의 의지를 시험해 보는지도 모를 일이지마는 이렇게 불행을 한꺼번에 한 사람에게 보낸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다,

시어머니의 중풍과 남편의 간암 그리고 조카들까지 맡아 형극(荊棘)의 한 평생을 살아온 이여사(李女史)의 앞날에 영광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