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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위(柳淵渭) 여사(女史)는 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 수곡동(水谷洞)에서 조선(朝鮮) 선조조(宣祖朝)의 학자 기봉(岐奉) 유복기(柳復起) 선생(先生)의 후예(後裔)로 태어나, 전통적인 가정에서 유가(儒家)의 부도(婦道)를 닦아 15세에 결혼하였는데, 그가 20살 때 남편이 병석에 눕게 되었다.
시조부모(媤祖父母), 시부모(媤父母)의 층층시하에서, 나의 어린 유여사(柳女史)로서는 모두가 힘겹고 어리둥절 할 뿐 이었으나, 친가에서 학덕(學德)을 겸비한 부친(父親) 유진두(柳鎭斗)씨의 유가적(儒家的) 가르침이 바탕이 되어 잘 이겨나갈 수 있었다.
유여사(柳女史)의 남편은 어린 나이에 거동을 못하는 몹쓸 병(病)에 걸렸으니, 가세는 점점 기울어져 가고 후사가 없음을 크게 걱정한 시(媤)어른들이 조카 남용순(南溶純)을 양자로 맞아 들이게 되었다.
시조부모(媤祖父母)의 노쇠, 남편의 병세의 악화, 양자의 교육문제 등으로, 생활이 더욱 곤궁해지자, 유여사(柳女史)는 아침 일찍 시(媤)어른의 식사준비와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고 나면, 곧 바로 들판에 나가 일을 마치고 귀가해서는 저녁식사 마련과 집안의 청소, 남편의 시탕(侍湯)과 간호 등으로 정말 눈코 뜰 새 없는 일과였다.
그러면서도 양자의 교육에 특별히 힘 써야 할 유여사(柳女史)의 처지인지라 갖은 애를 썼으나 노시(老媤)어른들의 봉양(奉養)과 와병중인 남편의 약대(藥代) 등의 뒷바라지가 여의치 않으니, 그의 노심초사는 더욱더 가중되어만 갔다.
그런 곤궁 속에서도 가정환경이 양자의 교육에 지장이 있는 것 같아 중학교를 마치고서는 대구로 진학을 시켰다.
그러고 보니 가계는 날로 어려워만 가고, 입학금·하숙비 등의 학비 마련의 길은 암담하기 그지없어 잠 못 이루고 혼자서 눈물지은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다행하게도 양자 남용순(南溶純)은 그렇게 애쓰는 모친(母親) 유여사(柳女史)의 고생을 새기면서 학업에 열중한 결과,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장학생으로 3년간의 혜택을 입었다.
유여사(柳女史)의 정성에 하늘이 감응 하였음이리라.
시조부(媤祖父) 미제(未濟) 남효순(南孝淳), 시부(媤父) 지암(芝菴) 남병기옹(南炳基翁)은 인품이 고결하고 명망 높은 당대의 거유(巨儒)인데, 가운이 불운하여 중년에 참척(慘慽)으로 상심(傷心)이 말할 수 없어 화병으로 눕게 되었으나, 유여사(柳女史)의 뛰어난 효성(孝誠)으로 양대(兩代) 어른 모두가 장수하였다.
유여사(柳女史)의 독행(篤行)에 감동된 친척들의 도움으로 양아들은 경복대학교를 졸업시켰으나, 그의 남편은 유여사(柳女史)의 눈물어린 간병의 보람도 없이 병고에서 인생의 영화도 누리지 못한 채 고인이 되었으니, 인생의 무상함을 새삼 실감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한없이 흘렸던 것이다.
유여사(柳女史)는 층층시하에서 어려운 가계를 검약과 인내로 꾸렸으며, 시(媤)어른께 효행(孝行)을 다하여 천수를 누리시게 했고, 양자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유능한 사회의 역군으로 키워 냈으니, 유여사(柳女史)의 장(壯)한 행적과 뛰어난 부덕(婦德)은 우리 전통부도(傳統婦道)의 전형으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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