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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칠순(李七順) 여사(女史)는 농가의 맏딸로 태어나 21세에 결혼하여 그런대로 신혼생활을 착실하게 해오던 중 결혼 6년만에 남편이 결핵(結核)으로 몸저 눕게 되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용기(勇氣)를 잃지 않고 마음을 가다듬어 남편의 병간호에 추호의 소홀함도 없이 구약(救藥)과 병(病) 시중을 하면서 남편이 하던 가사와 농사일까지 도맡아 했다.
그러나 남편의 병환은 점점 심해져서 이여사(李女史)가 불철주야(不撤晝夜)애쓴 보람도 없이 1981년 시부모(媤父母)와 시동생, 그리고 세 자녀를 남겨 두고 타계하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내려앉는 듯 하였으나 자신이 애절(哀切)한 마음은 누르고, 노경(老境)에 자식을 잃은 시부모님의 심정을 헤아려 도리어 시부모(媤父母)님을 위로하면서 남편이 남기고 간 세 자녀의 잠든 머리를 쓰다듬은 이여사(李女史)의 눈에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질 때가 많았다 한다.
29세에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된 그였지만 언제까지나 실의(失意)에 젖어 있을 수 만은 없었다.
돌아간 남편의 몫까지 다 하겠다며 3,000평의 농사를 혼자 힘으로 경작(耕作)해 가면서 시부모(媤父母)님을 극진히 모시던 중, 남편이 사망하고 그 슬픔과 시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시부(媤父)님이 중풍으로 병석에 눕게 되니 죽은 남편이 명이 다해 하는 수 없었다.
손 치더라도 시부(媤父)님께서는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도록 온갖 정성을 다하여 시봉(侍奉)하였다.
좋다는 약(藥)은 두루 구하여 시탕(侍湯)해 드리며, 시부(媤父)님을 업기도 하면서 의성(義城)·안동(安東)·영천(永川) 등지로 어디든 용하다는 의원은 두루 찾아다녔고, 충주(忠州)까지 모시고 가서 1개월 동안 입원치료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4년 동안을 하루같이 성력(誠力)을 다하여 병(病)구완을 했으나, 그 보람도 없이 시부께서는 1988년 1월에 끝내 숨을 거두시니, 이여사(李女史)는 자신의 봉친정신(奉親精神)이 부족했던 소치라 여기고 단장의 비통을 금하지 못하였다.
결혼 8년만에 남편을 잃고 29세에 의지할 데 없는 청상(靑孀)이 되어, 지극정성으로 구환(救患)해 오던 시부(媤父)마저 여읜 이여사(李女史)는, 살아계시는 시모(媤母)님은 어떻게 하든 고생시키지 않고 편안히 모셔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오늘도 시모님을 봉양(奉養)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한 이여사(李女史)는 혼자 손으로 세 자녀를 훌륭히 교육시키고 있다.
남편 없이 시부모(媤父母)의 구환(救患)과 시봉(侍奉)에 젊음을 불사르고 있는 이여사(李女史)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에게 멸사효친(滅私孝親)의 등대수(燈臺手)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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