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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씨(權赫在氏)는 책가게를 경영(經營)하면서 서점(書店)에 딸린 단간방(單間房)에서나마 홀어머니를 모시고 희망(希望)찬 장래(將來)를 설계(設計)하면서 고달픔을 잊고 열심(熱心)히 살아왔다.
그러던 중, 1980년(年) 가을의 어느 날 새벽에 모친(母親)이 교회(敎會)에 갔다가 돌아오시는 길에서 자전차(自轉車)에 부딪쳐 넘어져, 바로 병원(病院)으로 옮겼으나 뇌출혈(腦出血)이라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진단(診斷)이 내려지고 68세(歲)의 노인(老人)으로서는 회복(恢復)이 어렵겠다는 의사(醫師)의 말은 절망적(絶望的)이었다.
그래서 약(約) 1년간(年間) 입원치료(入院治療)를 받았지만 차도(差度)의 기미(氣味)는 커녕 수족(手足)마저 쓰지 못할 뿐만 아니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병세(病勢)는 극도(極度)로 악화(惡化)되었다.
서점(書店) 일도 봐야 하고 모친(母親)의 병(病)구완도 해야 하는 감당(堪當)하기 어려운 처지(處地)의 나날은 실(實)로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권씨(權氏)는 총각(總角)으로서 익숙지 못한 솜씨로 살림살이로 한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더구나 밥짓기·식사·시중·빨래·간병(看病)·서점(書店)일, 때때로의 목욕(沐浴) 시중 등 1인(人) 수역(數役)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고생(苦生)을 하는 한(限)이 있더라도 혼신(渾身)의 봉양(奉養)으로 오직 모친(母親) 환후(患候)를 완쾌(完快)시켜 보겠다는 것이 그의 소망(所望)의 전부(全部)였다.
어떤 때는, 이부자리에 대소변(大小便)이 뒤범벅이 되어도 말도 못하고, 방(房)에 들어서는 심씨(沈氏)를 초점(焦點)을 흐리고 쳐다만 보는 모친(母親)을 보면, 왈칵 울어 버리고 싶은 충동(衝動)이 앞섰지만 그는 설움을 누르고 태연(泰然)하게 “어머님, 진작 치워 드리지 못해서 죄송(罪悚)합니다.”하고 고약한 냄새도 귀찮은 줄 모르고, 서두른 솜씨나마 치우면서 오직 모친(母親)의 괴로움만을 마음 아파하였다.
이렇게 주소일념(晝宵一念)으로 모친(母親)의 구환(救患)과 봉양(奉養)에 청춘(靑春)을 바쳐 오다가 모친(母親)이 병석(病席)에 누우신 지 4년(年)째가 되던 해, 즉 그의 나이 28세(歲) 결혼(結婚)을 하였다. 갓 시집온 그의 아내 또한 부군(夫君)의 시봉효성(侍奉孝誠)에 감화(感化)되어 시모(媤母)님의 병간호(病看護)와 봉양(奉養)에 성력(誠力)을 다해 주었다.
그러나 아내의 첫 출산(出産)으로 인(因)하여 산모(産母)와 아기의 뒷바라지까지 겹쳐, 권씨(權氏)의 목표(目標)는 더욱 늘어나 2개월(個月) 쯤은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이런 사실(事實)이 인근(隣近)에 알려지자, 너나 할 것 없이 모친(母親)에게 효도(孝道)하고 사업(事業)에도 충실(忠實)한 저런 젊은이가 어디 있겠느냐며 칭찬(稱讚)의 소리가 온 동리(洞里)에 가득찼다.
이들 부부(夫婦)는 앞으로 어떤 고난(苦難)이 닥치더라도 식물인간(植物人間)이나 다름없는 모친(母親)을 위해 더욱 정성(精誠)껏 봉양(奉養)하여, 모친(母親)의 여생(餘生)을 편안히 모시기에 성력(誠力)을 다 바치겠다고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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