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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자(李花子) 여사(女史)는 24세 때 빈한한 고씨가(高氏家)의 둘째 아들인 고순재씨와 결혼하여 한 뼘의 농토도 없이 단칸방을 얻어 분가하였다.
그러한 이여사(李女史)는 열심히 일하고 아껴 저축한 보람으로 지금은 답(畓) 1,350평과 전(田) 1,000평을 가진 중농(中農)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다.
시부모(媤父母)를 모시고 소규모의 영농(營農)을 하던 시숙(媤叔)이 강원도(江原道) 광산(鑛山)에 취업 차 고향을 떠나니 시부모(媤父母)를 가까운 부곡리(釜谷里)로 모셔놓고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도 이웃 마을까지 조석으로 문안 드리는 등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동민들로부터 효부(孝婦)라고 칭찬을 듣고 있다.
천성이 남의 괴로운 것을 보고는 그냥 지나쳐 버리지 못하는 터라 언제나 자신은 고달픈 것이었다.
이웃에 사는 분이 고혈압에 쓰러지자 밤중에 손수레에 환자를 싣고 버스정류장까지 가서 택시로 병원에 입원시키고 밤새 간호를 한 뒤 다음 날 서울의 가족에게 연락하리만큼 이웃을 내 몸 아끼듯 하였다.
1980년 율곡리(栗谷里)의 부녀회장으로 선임되어 유명무실한 부녀회의 회세(會勢)를 재정비하고 활성화시켜 40만원의 기금을 확보하고 지역방위훈련 및 수해복구현장을 위문, 격려하는 등 봉사하는 부녀회로 탈바꿈시키니 탁월한 지도력과 봉사정신을 인정 받아 1983년부터는 공검면(恭儉面) 부녀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1985년에 호랑이훈련에 참가한 상주(尙州) 육군 제 743관리대 소속 60명에게 우중임에도 불구하고 지정에 손 국수를 만들어 경운기에 싣고 가서 야식으로 제공하는 한편, 1987년 7월의 집중호우로 인한 수해 시에는 지역주민과 현역병 70명이 동원된 수해복구 작업현장에 간식(국수, 막걸리, 부침, 음료수)을 제공하였다.
1985년부터는 행정기관에서 농촌 쓰레기수거제도가 실시되자, 평소 쓰레기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혼자서 자연보호를 겸하여 이 일을 해 오던 이여사(李女史)는 이에 적극 참여하였다.
부녀회가 중심이 되어 경운기를 직접 몰고 집집마다 다니며 수거하고 이를 선별하여 자원재생공사에 판매한 대금으로 생활필수품을 구입하여 각 가정에 배부하는 등, 능동적인 봉사활동으로 대처하여 동리는 모범부락으로 선정되고, 이여사(李女史)는 1986년에는 상주군수(尙州郡守)의 표창, 1987년에는 상주(尙州) 청년회의소회장의 군민모범상을 수상한 바도 있다.
이와 같이 이여사(李女史)는 1987년 불행하게도 부군(夫君)과 사별하고, 자녀를 거느리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좌절(挫折)하지 않고, 불우한 사람을 돕고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남달리 적극 참여하여 모든 여성의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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