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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조씨(郭相祚氏)는 부모(父母)님께서 생활(生活)이 곤궁(困窮)하게 일찍이 북간도(北間島)에 이민(移民)갔던 개척민(開拓民)의 3남(男) 1녀(女) 중(中)의 3남(男)으로 태어났는데, 부친(父親)이 그 곳에서 별세(別世)하시자 13세(歲)때 중형(仲兄)은 만주(滿洲)에 처진 채 모친(母親)과 3남매(男妹)는 귀향(歸鄕)했으나, 가사(家事)는 여전(如前)히 곤란(困難)하여 품팔이로써 가사(家事)를 돕던 중 백형(伯兄)마저 기세(棄世)한 비통(悲痛)을 겪었다.
10대(代) 어린 나이로 가장(家長) 노릇을 하면서 살아오다가 20대(代)에 접어들어,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했던 곽씨(郭氏)는 모친(母親)의 뜻을 좇아 결혼(結婚)하였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부부(夫婦)가 합심(合心)하여 그런 대로 행복(幸福)하게 살아왔는데, 지금부터 25년 전(年前) 모친(母親)이 61세(歲) 되던 해에 비운(悲運)이 덮치기 시작하였다.
건강(健康)하시던 모친(母親)에게 시력이상(視力異常)이 생겼던 것이다.
모든 것이 안개에 가린 듯 가물거린다는 모친(母親)의 답답해 함에 처(處)한 곽씨(郭氏)는 백방(百方)으로 약(藥)을 구(求)하여 치료(治療)하였으나 모친(母親)의 병세(病勢)는 날로 악화(惡化)되더니, 61세(歲)때에 기어이 앞 못 보는 맹인(盲人)이 되고 말았다.
곽씨(郭氏)는 하루아침에 눈뜬 장님이 된 모친(母親)의 손발이 되어 화장실(化粧室) 출입(出入)은 물론(勿論), 조석(朝夕)으로 꼬박 지켜 앉아서 손수 식사(食事) 수발도 드렸고, 목욕(沐浴)도 시켜 드리고 의복(衣服)도 갈아 입혀 드리면서 정결(淨潔)하게 시봉(侍奉)하는 데 성력(誠力)을 쏟았다.
바깥 나들이를 할 때는 지팡이 대신(代身)으로 그가 모시고 다니면서 손발이 되어 드리고, 때로는 등에 업고 친지(親知)들 집으로 모시고 가곤 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노모(老母)님이 깊은 잠에 드실 때까지 고담(古談)이나 전설(傳說)등으로 자장가 구실을 해 드리는 등, 그의 뜨거운 효심(孝心)은 86세(歲)에 이르는 지금까지 25년(年間)이나 계속(繼續)되었으니, 세상(世上)에 이런 출중(出衆)한 효자(孝子)가 또 어디 있겠는가라고 동민(洞民)들은 입을 모아 칭찬하고 있다.
한편으로 곽씨(郭氏)는, 남달리 근면성실(勤勉誠實)하여 어렵고 궂은 일도 꺼리지 않고 열심(熱心)히 땀 흘린 보람으로 현재(現在)는 전답(田畓) 4,500평(坪)을 마련하여 중농(中農)의 가세(家勢)에까지 발돋움하였다.
자녀교육(子女敎育)에도 각별(恪別)한 관심(關心)을 기울여 그의 2남(男) 1녀(女)도, 그들의 부모(父母)가 조모(祖母)님께 바치는 효성(孝誠)에 감화(感化)되어 학업(學業)이나 생활(生活)에 매우 착실(着實)하다.
"앞 못 보는 장님을 25년(年) 동안을 하루같이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해 왔기에 저토록 장수(長壽)하지 않았겠는가”라고 입을 모으는 동민(洞民)들의 솔직(率直)한 탄사(歎辭) 그대로, 곽씨(郭氏)의 지극(至極)한 효행(孝行)없이 장남인 그의 노모(老母)가 86세(歲)에 이르는 이 날까지 건강(健康)을 유지(維持)하면서 장수(長壽)할 수 있었을까.
곽씨(郭氏)의 이와 같은 장(壯)한 효행(孝行)이야말로 만인(萬人)의 귀감(龜鑑)이요, 모든 사람의 사표(師表)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疑心)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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