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백음준(白陰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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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1986년 4월 16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선산군 무을면
열부(烈婦) 백음준(白陰俊) 45세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에서 어머니의 참사랑이 얼마나 숭고(崇高)하고 위대(偉大)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머니가 아니었던들 맹자(孟子)가 성인(聖人)이 되었을 리(理)가 없었을 터인데, 바로 이에 못지 않는 훌륭한 부녀상(婦女像)이 있으니, 그가 바로 백음준(白陰俊) 여사(女史)이다. 

전처(前妻)의 자식(子息)이 있는 가정(家庭)에 재취(再娶)로 출가(出嫁)한 백여사(白女史)는 전처(前妻)의 자식(子息)들을 자신(自身)이 낳은 자식(子息) 이상(以上)으로 사랑하며 양육(養育)하였다. 그의 사랑이 얼마나 희생적(犧牲的)이었으면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이 이런 말까지 했을까. 

"전처(前妻)의 자식(子息)을 그렇게까지 사랑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식(子息)들이 아무리 말썽을 부려도 얼굴 한 번 찡그리는 것을 못 보았고 때가 묻은 옷 입은 것 한 번 본 일이 없다. 자식(子息)들이 밖에 나가 놀다가 넘어져서 조그마한 상처(傷處)라도 입으면 자신(自身)의 아픔 이상(以 上)으로 괴로워하면서 눈물지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기(自己)가 낳은 자식(子息)들이 아닌데도 그렇게 친자식(親子息) 이상(以上)으로 돌보아주고 있으니, 세상(世上)에 그런 인자(仁慈)한 어머니가 어디 또 있겠는가?" 그를 알고 찬사(讚辭)를 아끼지 않는 인근주민(隣近住民)의 말 그대로, 백여사(白女史)의 사랑은 천사(天使)와 같은 희생적(犧牲的)인 사랑 그것이었다. 

그러던 중 남편(男便) 위암(胃癌)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되니 백여사(白女史)는 생각지도 않던 고민(苦悶)에 빠지게 됐다. 

그 날부터 6년간(年間)을 남편(男便)을 뒷바라지에 전심전력(全心全力)하면서 실질적(實質的)인 가장(家長) 역할(役割)을 해 왔다. 

전처(前妻) 자식(子息)들과 줄줄이 태어난 친자식(親子息)들을 위해 남편(男便) 대신(代身) 아버지 노릇과 어머니 노릇을 하면서 힘겹게 가정(家庭)을 지켜 나갔다. 

그러나 남편(男便)은 끝내 아내의 정성(精誠)어린 간호(看護)도 아랑곳 않은 채 별세(別世)하고야 말았다. 

그 후(後) 백여사(白女史)는 불쌍한 전처(前妻) 자식(子息)들을 친자식(親子息) 이상(以上)으로 더욱 알뜰히 보살피며 사랑으로 키워 나갔다. 

그런데 남편(男便) 사망(死亡)의 슬픔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前)에 이번에는 또 시(媤)동생이 병석(病席)에 눕게 됐는데, 그 역시 남편(男便)과 똑 같은 위암(胃癌)이었으나, 세상(世上)에 이런 불행不 幸)의 연속(連續)이 또 어디 있을까? 백여사(白女史)는 시(媤)동생을 위해서 남편(男便)때와 다름없이 지극(至極)한 간호(看護)로 보살폈으나, 그 역시 제 명(命)을 다하지 못하고 타계(他界)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실망(失望)하지 않고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오뚜기 인생(人生)처럼 더욱 꿋꿋이 살아나가면서 자녀(子女)들을 모두 대학(大學)까지 보내기도 하였다. 

지금 아들 둘은 회사원(會社員)으로 그리고 또 하나의 아들은 고등학교(高等學校) 교사(敎師)로 근무(勤務)중(中)이고, 금년(今年) 대학교(大學校) 졸업예정자(卒業豫定者)가 1명(名)이고, 막내아들은 대학(大學) 재학(在學)중(中)이며, 딸은 훌륭한 가문(家門)에 출가(出嫁)를 시켜, 어머니가 해야 할 일들을 훌륭하게 완수(完遂)해 냈다. 세상(世上)에 이런 장(壯)한 어머니가 또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