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김복자(金福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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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1986년 4월 16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점촌시 신기동
열부(烈婦) 김복자(金福子) 35세

김복자(金福子) 여사(女史)의 가정(家庭)은 시부(媤父)님이 쌍용양회(雙龍洋灰) 문경(聞慶)공장(工場)에 취업(就業)해 있었고, 거리다 또 4,000여평(餘坪)의 농토(農土)까지 가지고 있어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生活)을 해 왔다. 

그러던 중 뜻밖에도 남편(男便)은 자녀(子女) 셋을 남겨 두고 오랜 투병(鬪病) 끝에 간경화병(肝硬化症)으로 타계(他界)하는 바람에 단락(團樂)했던 이 가정(家庭)에도 암운(暗雲)이 덮기 시작했다. 남편(男便)의 별세(別世)로 그나마 목숨처럼 지켜 왔던 전답(田畓) 4,000여평(餘坪)도 1,000여평(餘坪)으로 줄어들었고, 그 후(後) 정년퇴직(停年退職)한 시부(媤父)님의 퇴직금(退職金)도 병원비(病院費) 청산(淸算)에 전액(全額)이 지출(支出)되어, 하루아침에 가정생활(家庭生活)에 커다란 위협(威脅)을 받게 되었다. 

졸지(猝地)에 밀어닥친 고난(苦難)이 어디 그뿐이었으랴. 시(媤)누이와 시(媤)동생 그리고 자신(自身)이 낳은 3남매(男妹) 등과 시부모(媤父母)님까지 모셔야 하는 무거운 짐들이 그의 앞길을 더욱 어둡게 했지만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칠전팔기(七顚八起)의 굳은 의지(意志)와 집념(執念)으로 설계(設計)를 알차게 세워 나갔다. 

우선 그는 가족(家族)들의 생계(生計)를 위해 화장품(化粧品) 외판원(外販員)과 요쿠르트 외판원(外販員)으로 활동(活動)하면서 어려운 생활(生活)을 하나 하나 풀어 나갔지만, 어느 날 갑자기 시부(媤父)님께서 위암(胃癌)이라는 의사(醫師)의 선고(宣告)에는 눈앞이 아찔할 수 밖에 없었다. 초기(初期)에 속(速)히 치료(治療)를 하면 회복(回復)이 가능(可能)할 수 있다는 의사(醫師)의 말에 즉시(卽時) 파티마 병원(病院)에 입원(入院)을 시킨 후(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성(精誠)껏 간호(看護)하였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나 할까 천만다행(千萬多幸)하게도 초기(初期)에 재빨리 치료(治療)한 탓으로 몇 달 후(後) 무서운 암(癌)을 물치리고 건강(健康)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며느리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무서운 병(病)을 물리치고, 지금에 와서는 농사(農事)일도 할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다행(多幸)스러운 일인가. 며느리의 피나는 정성(精誠)이 시(媤)아버지를 살려 놓았다.”이 같은 인근주민(隣近住民)의 감탄(感歎)의 말 그대로 김여사(金女史)의 기민(機敏)한 판단(判斷)으로 즉시(卽時) 입원(入院)을 시키지 않았던들, 그의 시(媤)아버지는 유명(幽明)을 달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말해서 재빠른 대처(對處)와 지극(至極)한 간호(看護)가 시부(媤父)님의 목숨을 살려 놓았다고 해도 과언(過言)은 아닐 것이다. 

김여사(金女史)는 그 후(後) 온갖 어려운 환경(環境) 속에서도 시(媤)누이와 시(媤)동생들을 모두 고등학교(高等學校)까지 졸업(卒業)시켜 지금은 각기(各其) 공무원(公務員)과 회사원(會社員)등으로 근무(勤務)하고 있으며 자신(自身)의 자녀(子女)들도 장녀(長女)는 간호원(看護員)으로 차녀(次女)는 중학(中學)에 그리고 장남(長男) 역시 중학교(中學校)에서 열심히 공부(工夫)하고 있게끔 정성(精誠)스러운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한 후(後) 오직 자녀(子女)들과 시댁(媤宅) 식구(食口)들을 위해 반평생(半平生)을 바쳐 온 김여사(金女史)는, 비단 가정(家庭)만을 위해서 사랑과 봉사(奉仕)의 십자가(十字架)를 메고 온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도 모범여성(模範女性)으로 언제나 칭찬(稱讚)의 대상(對象)이 되고 있다. 

특(特)히 노인(老人) 공경(恭敬)과 어린이 사랑에 헌신(獻身)한 탓으로 마을 사람들은 김여사(金女史)를 가리켜 ‘사랑의 기수(旗手)’라는 별명(別名)으로 그를 극진히 존경(尊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