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김동완(金東婉)

페이지 정보

본문

제29회(1986년 4월 16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상주시 냉림동
열부(烈婦) 김동완(金東婉) 50세

어버이 봉양(奉養)에 대한 대표적(代表的)인 효녀(孝女)를 들 수 있다면 심청(深靑)을 손꼽을 수 있겠으나, 30여년간(餘年間) 실명(失明)한 남편(男便)의 등불이 되어 온 김동완(金東婉) 여사(女史)는 현대판(現代版) 춘향(春香)이라고나 할까. 일편단심(一片丹心)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오직 남편(男便)의 지팡이 구실을 해 온 열부(烈婦)라 하겠다. 

빈농(貧農)의 가정(家庭)인 그의 시댁(媤宅)은, 시모(媤母)가 일찍 돌아가시고 병석(病席)에 있는 시부(媤父)님 및 시(媤)동생 2명(名)과 함께 동거(同居)해야 하는 어려운 살림이었으며, 그나마 결혼(結婚)과 동시(同時)에 남편(男便)까지 군(軍)에 입대(入隊)하는 곤경(困境)에 처(處)하게 됐다. 

김여사(金女史)는 남편(男便)이 제대(除隊)할 때까지 꼬박 3년(年) 동안을 남의 집 일을 돌보면서 그럭저럭 어려운 생활(生活)을 해 왔지만 조금도 고달파하지 않았고, 남편(男便)이 제대(除隊)후(後) 얼마 있다가 광산(鑛山)에 취직(就職)이 됐다는 소식(消息)에 춤을 추듯이 기뻐한 그 녀(女)였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瞬間)일뿐, 어느 날 광산(鑛山)에서 작업(作業)을 하던 남편(男便)화약폭발사고(火藥爆發事故)로 두 눈이 실명(失明)이 됐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비통(悲痛)한 소식(消息)에 김여사(金女史)는 그만 졸도(卒倒)하고야 말았다.
다음 날부터는 입원(入院)중(中)인 남편(男便)을 간호(看護)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시부(媤父)님 봉양(奉養)과 3명(名)의 자녀(子女)들도 돌봐야 했고, 거기다 또 자신(自身)이 밥벌이에 나서야 하는 등, 그야말로 1인(人) 3역(役)의 고달픈 나날이 이어졌지만, 행여나 시부(媤父)님과 남편(男便)이 절망(絶望)할까봐 짜증이나 괴로운 내색(內色)은 일절(一切)하지 않고, 자신(自身)의 몸보다 더 소중(所重)하게 보살펴 왔다. 

특히 남편(男便)이 실명(失明)한 후(後) 지금껏 30년(年) 동안을 한결같이 때로는 남편(男便)의 지팡이가 되어 주기도 했고, 또한 때로는 남편(男便)의 등불이 되기도 하면서 남편(男便)을 하늘처럼 섬겨 왔다. 

이러한 김여사(金女史)의 극진(極盡)한 정성(精誠)에 그의 남편(男便)은 너무나 미안(未安)해서 동민(洞民)들이 관광(觀光)나들이를 할 때 같이 놀러 가라고 몇 번이나 권(勸)했지만, 그럴 때마다 김여사(金女史)의 대답(對答)은 한결같았다. 

“당신은 앞도 못 보시는데 나 혼자서 뭐가 좋다고 나들이를 가겠어요. 저는 이렇게 당신과 같이 있는 것으로 족(足)하니 그런 말은 다시 입 밖에도 내지 말아요.” 

즐거우나 괴로우나 남편(男便)과 더불어 동고동락(同苦同樂)하리라는 그의 마음은 진심(眞心) 이상(以上)의 천심(天心)이었다. 

김여사(金女史)는 그 후(後) 남편(男便)의 사고(事故)로 인(因)하여 받은 얼마간의 보상금(報償金)으로 농토(農土)를 구입(購入)하여 손수 남편(男便) 대신 자녀농군(子女農軍)이 되어 힘겨운 농사(農事)를 꾸려가면서 자녀교육(子女敎育)에도 최선(最善)을 다하고 있는데, 현재 그의 장녀(長女)는 서독(西獨)에서 백의(白衣)의 천사(天使)로 활약(活躍)하고 있다고 한다. 

'잉꼬부부(夫婦)‘라는 별명(別名)이 뒤따를 만큼 이들 김동완(金東婉) 여사(女史) 부부(夫婦)는, 누가 보나 다정(多情)한 해바라기 가족(家族)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