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정태선(鄭泰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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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1986년 4월 16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예천군 용궁면
효부(孝婦) 정태선(鄭泰先) 56세

아무리 정성(精誠)을 다한다 해도 한(限)이 없는 것이 효도(孝道)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부모(父母) 생전(生前)에 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고쳐 못하는 것이 효도(孝道)일진대, 부모(父母)의 은혜(恩惠)가 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효도(孝道) 또한 끝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효(孝)의 참된 길을 걸어 복지부장관상(福祉部長官賞)까지 받은바 있는 출천지효부(出天之孝婦)가 있으니, 그가 바로 당년(當年) 56세(歲)의 정태선(鄭泰先) 여사(女史)이다. 

신혼초기(新婚初期) 전쟁(戰爭)의 와중(渦中)에다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시부모(媤父母)님을 평안(平安)히 모시는 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인내(忍耐)와 노력(努力)으로 웃어른들을 아무런 불편(不便)없이 봉양(奉養)해 왔는데, 그 대표적(代表的)인 예(例)가 노환(老患)으로 누워 계시는 시부(媤父)님께 바친 정성(精誠)스러운 간호(看護)였다. 

노환(老患)으로 병(病)드신 시부(媤父)님을 보살펴 온 정여사(鄭女史)는, 하루의 일과(日課)를 시부(媤父)님 병간호(病看護)를 위해 바칠 정도로 그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은 놀랍기만 하였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도 있듯이, 극진한 그의 보살핌으로 시부(媤父)님의 건강(健康)이 다소(多少) 회복(回復)되자, 이 모든 것이 정여사(鄭女史)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 덕택(德澤)이었다고 주변(周邊)에서는 찬사(讚辭)가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시부(媤父)님이 이번에는 노망증(老妄症)으로 정여사(鄭女史)의 마음을 괴롭혔다. 

시부(媤父)님의 노망증은 닥치는 대로 가재도구(家財道具)를 때려부수는 행패(行悖)에서부터 어디론가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되어 버리는 일에 이르는 등 끝이 없었다. 

따라서 정여사(鄭女史)는 새벽에 눈만 뜨면 시부(媤父)님 곁에 꼭 지켜 앉아서 갓난애기 지키듯 보살펴 왔다. 

광부(鑛夫)인 남편(男便)을 도와 조그만한 양계장(養鷄場)도 꾸려 나가야 했던 정여사(鄭女史)는 한편으로 생업(生業)에 종사(從事)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시부(媤父)님의 노망기(老妄氣)를 잠재워야만 했기에 그의 손길은 언제나 바쁘기만 했다. 

어떤 때는 그의 시부(媤父)님이 몇 십리(十里)밖에서 발가벗은 나신(裸身)으로 노망기(老妄氣)를 부린 일도 있었는데, 그 때도 정여사(鄭女史)는 손수 리어카로 모시고 집에 돌아왔으며, 또 어떤 때는 강(江)물에 뛰어들어 빈사(瀕死) 직전(直前)의 노망증(老妄症) 환자(患者)인 시부(媤父)님을 결사적(決死的)으로 구출(救出)해 낸 무용담(武勇談) 아닌 무용담(武勇談)도 있을 만큼, 정여사(鄭女史)의 효심(孝心)은 숭고(崇高)하기만 하였다. 

1985년(年) 5월(月) 복지부장관(福祉部長官)으로부터 자랑스러운 효부(孝婦賞)까지 받기도 한 정여사(鄭女史)는, 어려운 환경(環境)에서도 슬하(膝下)의 5남매(男妹)를 모두 고등학교(高等學校)를 마치게 하는 등, 남달리 자녀교육(子女敎育)에 대한 관심(關心)도 깊었지만, 무엇보다 도 해마다 맞는 시부(媤父)님 생신(生辰)에는 마을 노인들을 초청(招請)하여 주연(酒宴)을 베풀기도 했으며, 특히 공동 모내기와 공동벼베기·폐품수집·가족계획사업 등 부녀사업(婦女事業)에도 또순이처럼 정력(精力)을 기울여 동민(洞民)들로부터 많은 찬사(讚辭)를 받아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