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황순임(黃順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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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1981년 4월 11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달성군 성서면
효부(孝婦) 황순임(黃順任) 55세

18세(歲)에 결혼(結婚)한 황순임(黃順任) 여사(女史)는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생(苦生)하면서도 나름대로 행복(幸福)을 누리면서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고 열심(熱心)히 살아왔다.

그런데 기쁨과 즐거움도 잠시(暫時)뿐,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시부(媤父)님이 중풍(中風)으로 눕게 되면서부터 단락(團樂)했던 이 가정(家庭)에도 거친 파도(波濤)가 일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여사(黃女史)는 매일(每日)같이 정성(精誠)을 다해 보살펴 드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가사(家事)와 농사(農事)일에 충실(忠實)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편(男便)이 신장염(腎臟炎)으로 힘겨운 농사(農事)일을 못하게 되자, 1,000여평(餘坪)의 농토(農土)를 황여사(黃女史) 혼자서 가꿔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남자(男子)도 하기 힘든 농사(農事)일을 도맡아 하면서, 한편으로 시부(媤父)님과 남편(男便)에게 좋다는 약(藥)을 구(求)하기 위해 험준(險峻)한 산곡(山谷)을 헤매면서 약초(藥草)를 캐 오기도 했고, 때로는 냇가의 바윗돌을 뒤져서 가재를 잡기도 하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하늘도 탄복(歎服)할 정도였다. 

마침내 남편(男便)은 완쾌(完快)되었으니, 시부(媤父)님은 13년간(年間)이라는 긴 병력(病歷)만 남기고 71세(歲)를 일기(一期)로 세상(世上)을 떠나셨는데, 시부(媤父)님의 별세(別世)로 인(因)한 애통(哀痛)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모(媤母)님께서 또 중풍(中風)으로 쓰러져 병석(病席)에 눕게 되었다. 

따라서 기동(起動)을 못하는 시모(媤母)님을 위해서도 별세(別世)사신 시부(媤父)님 봉양(奉養) 못지않게 대소변(大小便) 받아내기와 목욕(沐浴)등 뜨거운 정성(精誠)이 뒤따랐다. 

그의 정성(精誠)이 오죽이나 지극(至極)했으면, 시모(媤母)님께서 말을 더듬거리며 "우리 며느리 만만세다."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눈물을 흘리셨을까. 

그런데,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고나 할까, 또 하나의 고뇌(苦腦)가 그의 심장(心臟)을 짓누르고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친정(親庭)어머니가 별세(別世)함으로써 아들이 없는 친정(親庭)아버지를 부득이(不得已) 황여사(黃女史)가 모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댁(媤宅)으로 모셔온 친정(親庭)아버지의 간병(看病)을 위해 안방(房)과 옷방(房)을 번갈아 드나들면서 그의 효심(孝心)을 모두 쏟아 온 황여사(黃女史)는, 그 자신(自身)이 피로(疲勞)에 지쳐 쓰러진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는 어려운 시련(試鍊)이 뒤따를수록 이를 악물고 간병(看病)에 더욱 열심(熱心)히 전념(專念)하였다. 

그의 효심(孝心)이 오죽 갸륵했으면, 뭇사람들이 황여사(黃女史)를 일컬어 효부(孝婦)의 산 표본(標本)이라고 칭찬(稱讚)하였을까. 1975년(年) 10월 성서국민학교장(城西國民學校長)이 수여(授與)하는 효부상(孝婦賞)을 받기도 한 황여사(黃女史)는, 누가 보나 효(孝)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만 같았다. 

비록 그는 무학(無學)이었지만 '孝(효)'라는 한자(漢子)만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