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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歲)의 어린 나이에 시부(媤父)와 시(媤)동생 3남매(男妹)가 살고 있는 가난한 농가(農家)에 시집온 이병하(李丙夏) 여사(女史)는 매일(每日)같이 남편(男便)과 더불어 흙 속에 파묻혀 살면서 힘겨운 농사(農事)일을 꾸려나가는 한 편, 홀로 계시는 시부(媤父)님 봉양(奉養)과 어린 시(媤)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열심(熱心)히 하면서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그가 시집온 지 1년(年)만에 평소 도박(賭博)이 심(甚)했던 시부(媤父)님의 잘못으로, 목숨처럼 아껴왔던 1.000여평(餘坪)의 토지(土地)가 타인(他人) 명의(名義)로 넘어가는 바람에, 가난은 최악(最惡)의 경지(境地)에 빠져들게 되었다.
시부(媤父)님의 도박(賭博)으로 하루아침에 알거지 신세(身勢)가 되어 버린 그의 가정(家庭)은,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표류(漂流)하는 돛대 없는 조각배처럼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연(漠然)하기만 하였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한숨과 눈물로만 세월(歲月)을 보낼 수 없어, 그 날부터 이여사(李女史)는 '잃어버린 토지(土地)를 다시 찾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意志)로 품팔이와 막노동(勞動)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열심히 일을 하였다.
굶주린 창자를 참아가며 구슬땀 흘려 일한 지 몇 년(年), 마침내 그의 힘으로 빼앗겼던 농토(農土)를 되찾게 되었다.
그 때 시부(媤父)님은 감격(感激)에 넘쳐 며느리의 손목을 덥썩 잡고 "참말로 고맙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다."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그 후(後) 시부(媤父)님은 화투장만 보아도 뒤로 돌아 앉을 정도(程度)로 도박(賭博)과의 인연(因緣)은 딱 끊어버렸다고 한다.
며느리의 도움으로, 두 딸을 가진 여인(女人)과 재혼(再婚)의 기쁨까지 맛보게 된 시부(媤父)님은, 되찾은 농토(農土)에서 며느리와 더불어 정열(情熱)을 쏟으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군(軍)에 입대(入隊)한 그의 남편(男便)이 전사(戰死)했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비보(悲報)는 다시 한 번 이여사(李女史)를 울게 하였다.
이로써 이여사(李女史)는 25세(歲)의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되었고, 시부(媤父)님은 화병을 얻어 이듬해 유명(幽明)을 달리하는 또 하나의 비운(悲運)을 맞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실의(失意)와 절망(絶望)으로 나날을 보낼 수만은 없었다.
어린 시(媤)동생들과 그가 낳은 딸들을 키우기 위해선, 보다 더한 인내(忍耐)와 용기(勇氣)가 있어야만 했기에, 그는 과감(果敢)히 슬픔을 떨쳐버리고 다시 일터를 찾아 열심(熱心)히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였다.
마침내 그의 힘으로 시(媤)동생들은 고등학교(高等學校)를 마치게 하였고, 새 시모(媤母)님이 데리고 온 두 딸도 모두 중학(中學)까지 마치게 한 후(後) 출가(出嫁)시켰다.
그가 39세(歲) 되던 해에, 농토(農土)는 시(媤)동생에게 맡기고, 이여사(李女史)는 두 딸을 데리고 시내(市內)로 나와 쌀가게를 하면서 단락(團樂)한 생활(生活)을 하고 있다. 이제 그의 나이 53세(歲), 이여사(李女史)는 결혼 후(結婚後) 줄곧 시가(媤家)를 위한 희생(犧牲)과 봉사자(奉仕者)였으며, 그가 걸어온 일생(一生)이야말로 메마른 현대사회(現代社會)에서는 볼 수 없는 불멸(不滅)의 등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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