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이재걸(李載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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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1981년 4월 11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경주시 효현동
효자(孝子) 이재걸(李載杰) 43세

팔순(八旬) 노부모(老父母)와 처자(妻子)를 거느린 이재걸씨(李載杰氏)는 비록 막노동(勞動)으로 어렵게 연명(延命)해 가고 있는 딱한 처지(處地)이긴 했지만, 남달리 효심(孝心)이 두터워 마을사람들로부터 칭찬(稱讚)의 대상(對象)이 되고 있다. 

그에게도 자녀(子女)가 5명(名)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보다 노부모(老父母)에게 신경(神經)을 더 기울일 정도(程度)로 지금껏 20여(餘)년간(年間)을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해 온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중풍(中風)으로 쓰러지게 된 부친(父親)의 느닷없는 적신호(赤信號)에 몸부림쳐 울기도 하였다. 

"아버님 불효자식(不孝子息)의 잘못으로 아버님께서 병(病)을 얻으셨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부친(父親)의 중풍(中風)이 자신(自身)의 불효(不孝)탓이라고 말하는 그의 뜨거운 효심(孝心). 

그 날부터 전신마비(全身痲痺)로 기동(起動)을 할 수 없는 아버지의 대소변(大小便)받아내기와 목욕(沐浴)시키기, 옷 갈아입히기 등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했고, 식사(食事) 때마다 음식(飮食)도 한 술 두 술씩 떠서 잡수시게 해 드렸다. 

그리고 일손 틈틈이 깊은 산중(山中)을 헤매면서 약초(藥草)를 캐어다가 달여서 복용(服用)시키기도 했고, 푼푼이 모은 돈을 절약(節約)하여 중풍(中風)에 좋다는 신약(新藥)도 사다 드리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놀랍기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홀로 병석(病席)에 계시는 외로움을 달래 드리기 위해 마을 노인(老人)드을 모셔와 공허감(空虛感)을 메워 드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맛있는 음식(飮食)도 마련하여 대접(待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고 했듯이, 그의 지극(至極)한 간호(看護)와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의 보람도 없이 부친(父親)은 운명(殞命)하고 말았으며, 지금은 홀로 남은 노모(老母)님을 위해 못다한 그의 효성(孝誠)을 알뜰히 바치고 있다. 

이씨(李氏)는 그 동안 6년간(年間)에 걸쳐 반장직(斑長職)을 맡아 오면서, 반원(班員)들 상호간(相互間)의 친목도모(親睦圖謀)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이웃 돕기에도 앞장섰으며, 특(特)히 웃사람들을 공경(恭敬)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여러 차례에 걸쳐 실천(實踐)을 통(通)해 보여 주기도 했다. 

그 좋은 예(例)가 그의 지극(至極)한 경노사상(敬老思想)이다. 

어느 날 하루는 노망증(老妄症)으로 집을 잃은 노인(老人)이 우중(雨中)을 헤매고 있는 것을 보고, 수소문搜所聞)을 해서 노인(老人)이 살고 있는 자택(自宅)까지 모셔다 드리기도 했고, 수시(隨時)로 마을 노인(老人)들에게 담배와 술을 대접(待接)하는 흐뭇한 정경(情景)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노동(勞動)으로 생계(生計)를 잇고 있는 이씨(李氏)는, 일터로 가는 곳마다 존경(尊敬)의 대상(對象)이 되고 있는데, 사연(事緣)인즉 남달리 부지런하게 일하는 근면성(勤勉性)과 특(特)히 자신(自身)보다 단 한 살이라도 많은 웃사람을 대(對)하면 그렇게도 깎듯이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잘 지킬 수 없다는 것이, 그를 지켜본 주변(周邊) 사람들의 공통(共通)된 찬사(讚辭)였다. 

오막살이에서의 웃음은 궁중(宮中)의 웃음보다 진실(眞實)하다고나 할까, 비록 이씨(李氏)는 가난한 노동자(勞動者)이기는 했지만 가정(家庭)에서는 효성(孝誠)을 다하면서 언제나 웃음꽃을 피워 주고 있는 정원사(庭園師)처럼 부러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