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오정시(吳正時) 여사(女史)는 16세(歲) 때 그와 동갑(同甲)인 2대(代) 독자(獨子)와 결혼(結婚)하였는데, 서로가 아직 어린 소년(少年), 소녀(少女)에 불과(不過)했고, 동갑(同甲)이어서 신혼(新婚)의 꿈은 남달리 달콤하기만 하였다.
비록 오여사(吳女史)는 학교(學校) 문전(門前)에도 못 가본 무학자(無學者)이기는 했지만, 시부모(媤父母)님을 성심섬의(誠心誠意)껏 봉양(奉養)하고, 또한 남편(男便)을 하늘같이 여겨 알뜰히 섬겨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던 탓으로, 그의 행실(行實)은 신혼초(新婚初)부터 조그마치도 예의범절(禮儀凡節)에 어긋나는 일이 없을 만큼,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만점(滿點)이었다.
그런데, 비극(悲劇)은 군(軍)에 입대(入隊)한 남편(男便)이 장열(壯熱)하게 전사(戰死)함으로써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늙으신 시부모(媤父母)님과 남편(男便)이 남기고 간 딸 하나와 그리고 가난이었다.
그의 처지(處地)를 딱하게 여긴 친정(親庭)에서는, 개가(改嫁)하여 새로운 삶을 찾으라고 권유(勸誘)했고, 시부모(媤父母)님들도 한결같이 재혼(再婚)하여 새 가정(家庭)을 꾸며 보라는 성화였지만 그럴 때마다 오여사(吳女史)는, "시집온 날부터 나는 이 집 사람인데 어째서 저를 쫒아내려고 하십니까?" 하면서 항변(抗辯)을 하는 바람에 다시는 재혼(再婚)이야기는 꺼내지 못하였다.
'시부모(媤父母)님을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하면서 하나뿐인 딸을 훌륭하게 키워 보리라.' 바로 이것이 오여사(吳女史)의 굳은 결심(決心)이었다.
그 후(後) 그는 소작(小作)하던 농지(農地)를 지주(地主)에게 돌려주고, 온 동리(洞里)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어려운 가계(家計)를 꾸려나가는 한편, 항상(恒常) 즐거운 마음으로 시부모(媤父母)님을 지성(至誠)껏 봉양(奉養)하였다.
비록 가난은 했지만, 시부모(媤父母)님이 즐겨하는 음식(飮食)을 무리(無理)를 해서라도 장만해 드리기도 했고, 가끔 이웃 노인(老人)들까지, 자택(自宅)으로 초대(招待)하여 그의 정성(精誠)을 고루고루 나누어 드리기도 하는 등, 남달리 뜨거운 경노사상(敬老思想)에 감복(感服)하여 온 동민(洞民)이 그를 위해 효부(孝婦)잔치를 베풀어 주기도 하였다.
1974년(年) 79세(歲)를 일기(一期)로 시부(媤父)님이 별세(別世)할 떄까지, 오여사(吳女史)는 극진(極盡)한 효성(孝誠)을 바쳤는데, 장례식(葬禮式)날 동민(洞民)들로부터 다시 한 번 마음이 박수(拍手)를 받기도 했다.
대학(大學)에 다니는 딸을 위해 대구(大邱)로 거처(居處)를 옮긴 오여사(吳女史)는, 남의 집 가정부(家庭婦)로 일해서 얻은 수입(收入)과 년금(年金)으로 행상(行商)을 하기 시작(始作)하였고, 1977년(年)에는 그의 딸을 좋은 가문(家門)으로 출가(出稼)시키기도 하였다.
그 후(後) 오여사(吳女史)는 푼푼이 모은 돈으로 시조부(媤祖父)님의 묘소(墓所)와 시부(媤父)님의 묘소(墓所)를 같은 곳으로 이장(移葬)했는가 하면, 생존(生存)해 있는 시모(媤母)님의 묘소(墓所)까지 마련하는 등 조상(祖上)을 섬기는 그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또한 놀랍기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시모(老媤母)님을 지성(至誠)껏 모시고 있는 그는, 훗날 자신(自身)마저 죽게 되면 조상(祖上)에게 제사(祭祀)지낼 사람도 없음을 통곡(痛哭)하면서, 현재(現在) 생존(生存)한 시모(媤母)님을 위해 마치 죽은 사람에게 제사(祭祀) 지내는 식(式)으로 매월(每月) 초하루와 보름에 큰 상(床)을 차려 드리고 있다.
푼푼이 모은 돈으로 시댁(媤宅)의 가족묘지(家族墓地)까지 마련한 그의 놀라운 정성(精誠)에, 언젠가는 하늘도 푸짐한 상(賞)을 내려 주지 않으랴!
- 이전글제24회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윤명성 (尹明星) 25.05.16
- 다음글제24회 독행상(篤行賞) 이동규(李東奎) 25.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