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윤명성 (尹明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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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1981년 4월 11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경북 청송군 남면
효녀(孝女) 윤명성 (尹明星) 19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몸을 팔아 인당수(印塘水)에 몸을 던진 심청전(沈淸傳)은 우리 민족(民族) 효도(孝道)의 귀감(龜鑑)으로 우리 선조(先祖)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口傳)되어 오고 있지만, 심청이 못지않게 병든 아버지와 앞 못 보는 어머니 대신 농사일을 하며 어린 동생들의 학업 뒷바라지까지 하고 있는 '산골 처녀 심청'이 바로 윤명성양으로서, 윤양의 가족상황을 보면 병석에 누운 76세의 아버지와 앞 못 보는 어머니, 그리고 중학교에 다니는 두 동생 등 5명이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윤양은 가정형편에 따라 상급학교 진학 할 수는 없었지만, 이에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그 자신이 가정의 주춧돌이 되고 기둥이 되리라고 스스로 다짐한 후, 그날부터 아버지 병수발에 전력을 쏟으면서 한편으로 앞 못 보는 어머니를 위해 그의 지극한 효성을 다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만 해도 도시를 동경해서 무작정 상경하는 풍조가 활개 칠 때였지만, 윤양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가정을 지키고 고향을 지키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그의 꿈은 비록 어린 고사리 손이긴 하지만, 그의 힘으로 돈을 벌어서 부모님을 따뜻하게 봉양함과 아울러 동생들도 훌륭하게 키워보리라는 것이 윤양의 부푼 설계였다. 

6년 전까지만 해도 산 중턱 외딴집에서 근근 연명하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고질인 위장병이 악화되면서부터 가세가 더욱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윤양은 13세 때부터 가장 노릇을 해야만 했는데, 가장의 중책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의사로, 때로는 약사 구실도 겸해야 하는 그야말로 북치고 나팔 부는 격으로, 고사리 손길의 하루 일과는 너무나 바쁘기만 했다. 

따라서 한밤중에도 아버지의 신음 소리만 들리면, 급히 일어나 밤을 새워 병구완을 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한밤중에도 신약을 사오기 위해 수 십리 길을 달려가는 등 소녀가장이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벅차기만 했지만, 윤양은 조금도 마다하지 않고 항상 미소를 지으면서 부모님을 공손하게 봉양하였다.

그리고 병석을 지키면서 간호할 때도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운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간병을 하다가 한밤중에 졸릴 경우가 있으면, ‘어버이 살아계실 제 섬길 일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라는 시조를 머릿속으로 외면서 졸음을 쫓을 정도로 그의 효심은 두터우면서도 갸륵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운명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윤양의 지극한 정성도 외면한 채 그의 아버지는 1980년 겨울, 윤양이 극진히 간호하고 시중을 든 지 5년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그의 지극한 효심에 크게 감동한 나머지 서로가 앞 다투어 장의절차를 보살펴 주는 한편, 윤양을 진심으로 위로해주기도 하였다. 

한편 앞 못 보는 맹인 어머니에게는 그야말로 눈과 손과 발이 되어 드렸고, 상복은 항상 깨끗이 빨고 손질하여 입혀 드렸다.

뿐만 아니라, 비록 그 자신은 굶는 한이 있더라도 어머니에게만은 구미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권하는 등 그의 효심은 한이 없을 만큼 깊기만 했다. 

윤양은 굶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모진 가난을 헤치면서 가계를 꾸려나가야 했지만, 일손 틈틈이 과학적인 영농기술을 익히기 위해 영농에 관한 책자로 자기 수확도 알차게 쌓아 나갔다. 마침내 그는 남자도 하기 어려운 비닐하우스로 고추 조기재배(早期栽培)도 성공했고, 또한 볏짚으로 새끼도 꼬고, 홀치기도 하면서 돈벌이에 열중했다. 

그래서 돈이 생기면 생활비와 학비를 제외한 돈은 마을금고에 꼬박꼬박 저축하는 구두쇠작전도 알차게 펼쳐 나갔다. ‘티끌 모아 태산이 된다’ 는 말처럼 마침내 1980년에는 저축금액이 300만원을 돌파하게 되었는데, 그 돈으로 다시 논 560평과 밭 1200평을 사들이는 한편 11평짜리 아담한 기와집도 마련하였다. 

어릴 때의 소망이 마침내 완성되자, 윤양은 자신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제 그는 그의 부모도 이룩하지 못했던 자작농의 기쁨을 비로소 가지게 된 것이다. 또한 윤양은 효녀 농군으로서 지게도 지고 쟁기로 논밭도 갈고, 우차도 몰며 퇴비도 손수 잘 만들 만큼 모든 농사일에 익숙해졌다. 

특히 윤양은 눈먼 어머니를 대신하여 동생들에게는 자상하게 매사에 정을 쏟아, 그들이 공부에만 열중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데, 현재 큰 동생은 고등학교에, 그리고 막내 동생은 어엿한 중학생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들이 각기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윤양은 북바쳐 오르는 감회를 누를 길 없어 남몰래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지만, 누구보다도 앞 못 보는 그의 어머니의 감회는 남달리 깊었다. 

입학식 날 두 아들의 교복을 어루만지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의 어머니는 “이게 모두 네 누나 덕이니라. 누나의 은덕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어머니는, 몇 날 며칠을 두고 큰딸인 윤양의 두 손을 꼭 잡고 우는 것이었다. 

이제 윤양도 남들처럼 혼기에 들어섰는데, “내 걱정 말고 어서 시집갈 궁리를 해야지”하는 어머니의 말씀에,

“눈 먼 어머니를 홀로 놔 두고 제가 어떻게 나만의 행복을 찾아서 결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결혼은 먼 훗날 동생들이 모두 공부를 끝내고 장가를 가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해 볼 일이라고 말하며, 윤양이 희생과 봉사에 만족해 하는 표정은 조금도 거짓이 없는 진실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