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장팔근(張八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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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1982년 4월 13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양군 일월면
선행(善行) 장팔근(張八根) 38세

경남(慶南) 거창군(居昌郡)에서 출생(出生)한 장팔근씨(張八根氏)는 생후(生後) 1년(年)도 채 못되어 모친(母親)을 여의고, 그 위에 10여(餘)되던 해에는 부친(父親)마저 작고(作故)하였다.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남겨진 장씨(張氏)는, 국민학교(國民學校)를 간신히 졸업(卒業)하기가 바쁘게 남의 집 고용살이로 전전(轉轉)하였으며, 성장(成長)한 후(後)에는 임목벌채장(林木伐採場)에서 막노동(勞動)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78년(年) 그는 동네 어른들의 주선(周旋)으로 같은 처지(處地)에 있는 한 여성(女性)과 혼인(婚姻)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신혼(新婚)살이 방(房)하나 차릴 형편도 못 되는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 남의 집 향랑채에 신혼(新婚)살림을 차렸다. 

그 후 장씨(張氏)는 임목벌채장(林木伐採場)에서 성실(成實)히 일함으로써 주위(周圍) 사람들의 신망(信望)이 두터웠으며, 그의 부인(夫人) 또한 농사품팔이를 하면서 열심히 땀 흘려 받은 품삯을 알뜰히 모아, 그들은 초가삼간(草家三間)이나마 작은 내 집을 마련했고, 이들 젊은 부부(夫婦)의 순박(純朴)한 마음씨와 근면성(勤勉性)에 감탄(感歎)한 주민(住民)들은 언제나 품삯일은 이들에게 시키려고 다툴 정도(程度)였다. 

이렇게 노력(努力)한 결과 그들은 나름대로 행복(幸福)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씨(張氏)는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한 쪽 다리 불구(不具)인 노인(老人) 한 분을 집으로 모셔와서는 "여보, 불쌍한 노인(老人)이요. 아버님처럼 모시고 살아봅시다."라고 부인(夫人)을 설득(說得)했다. 

이에 부인(夫人)도 진심으로 동의(同意)하게 되어 그들은 노인(老人)을 집에 모시게 되었다. 

부모(父母)의 정(情)이 그리웠던 부부(夫婦)는 가난했지만 노인(老人)을 모시는 데 온갖 정성(精誠)을 다했다. 

더구나 그 노인(老人)은 동리(洞里)에서 17년(年) 동안 걸식(乞食)하던 사람으로 관절염(關節炎)으로 다리마저 불구(不具)였으며, 75세(歲)의 노령(老齡)으로 정신(精神)마저 정상(正常)이 아닌 관계로 대소변(大小便)을 방안에서 보기도 했지만, 그는 언제나 따뜻한 미소(微笑)로 대(對)하였으며, 이웃 나들이를 갈 때는 노인(老人)의 안전(安全)을 위해 자녀(子女)들이 꼭 모시도록 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명절(名節)에는 깨끗한 새 옷을 해 입혀 드리고, 자녀(子女)들과 함께 세배(歲拜)드리기를 잊지 않았다. 

1980년(年)부터 그 노인(老人)이 구호대상자(救護隊象者)로 얼마간의 부식비(副食費)와 연료비(燃料費)를 받게 되면서부터는, 그 돈을 노인(老人)의 이름으로 저축(貯蓄)하여 노인(老人)이 필요할 때 쓸 수 있도록 배려(配慮)해 드렸다. 

이런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을 본 이웃 주민(住民)들은 "장씨(張氏 부부(夫婦)가 외로운 노인(老人)을 친부(親父)님 이상으로 봉양(奉養)하는 것을 보니 부끄러움이 앞선다."고 입을 모았다. 

"진실(眞實) 중의 진실(眞實)은 사랑뿐이다."라고 말하는 장팔근씨(張八根氏)야말로, 인간애(人間愛)가 무엇인가를 체험(體驗)하여 실천(實踐)하는 사랑의 실천자(實踐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