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이영숙(李榮淑) 여사(女史)의 하루 일과(日課) 중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는 것은 교회(敎會)에 달려가 기도(祈禱)를 올리는 일이었다.
"하느님 아버지, 저의 남편(男便)과 시모(媤母)님이 건강(健康)을 되찾을 수 있도록 당신의 따뜻한 손길로 구원(救援)하옵소서, 차라리 이 몸을 병들게 하고 그들을 병마(病魔)에서 풀어 주옵소서!"
이여사(李女史)의 이 눈물겨운 기도(祈禱)는, 1966년(年) 남편(男便)인 이현익씨(李鉉翊氏)가 정신이상(精神異狀)으로 자리에 눕게 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繼續)되어 온 그의 피맺힌 호소(呼訴)였다.
남편(男便)을 대신하여 가장(家長)의 일을 떠맡아야 했으며, 남편(男便)을 이끌고 병원(病院)과 한의원(漢醫院) 그리고 여러 곳의 기도원(祈禱院)을 찾아 다녀야 했다.
좋다는 약(藥)은 다 구(求)하여 먹여도 낫지 않고 위장병(胃腸病)까지 겹쳐질 뿐 남편(男便)의 병세(病勢)는 조금도 나아지는 기미(氣味)가 없었다.
김천(金泉)의 모병원(某病院)에 입원(入院)하여 수술(手術), 가료(加療)까지 하였으나, 병세(病勢)는 여전(如前)하였다.
엎친 데 덮치는 격(格)으로 75세(歲)의 시모(媤母)님이 중풍(中風)으로 쓰러지는 불행(不幸)이 겹쳐 왔다.
남편(男便)과 시모(媤母)님의 간병(看病)을 함께 해야 하는 이여사(李女史)의 나날은 잠시의 쉴 틈도 낼 수 없는 고역(苦役)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노고(勞苦)를 알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신이상자(精神異常者)인 남편(男便)은 물론이요, 시모(媤母)님까지도 정성(精誠)들여 달여 놓은 약(藥)을 놓고 "이거 독약(毒藥)이 아니야?" 며, 약사발을 마당에 내던지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그는 얼굴 한 번 찡그리는 일 없이 언제나 시모(媤母)님을 설득(說得)하였으며, 매일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야 하는 궂은 일도, 모두 이여사(李女史)의 효심(孝心)어린 마음으로 이겨냈다.
이러한 어려운 역경(逆境)속에서도 이여사(李女史)는 3남(男) 1녀(女)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 장녀(長女)는 서울 공대(工大)를 장학생(奬學生)으로 졸업(卒業)하게 했으며, 장남(長男)이 경대(慶大)를 다니는 것을 비롯하여, 자녀(子女) 모두가 어머니 이여사(李女史)를 기쁘게 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이여사(李女史)의 집안을 두고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은 장(壯)한 어머니가 장(壯)한 아들딸을 키워 냈다고 하면서 칭송(稱頌)이 대단하였다.
오늘도 새벽 길을 더듬어 교회(敎會)를 찾은 이여사(李女史)의 유일(唯一)한 기도(祈禱)는, 남편(男便)이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염원(念願)이었다.
- 이전글제25회 독행상(篤行賞) 이정순(李貞洵) 25.05.16
- 다음글제25회 독행상(篤行賞) 김영자(金榮子) 25.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