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김순단(金順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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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1982년 4월 13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상주군 외서면
효부(孝婦) 김순단(金順丹) 50세

김순단(金順丹) 여사(女史)는 1955년(年)에 가난한 농가(農家)에 출가(出嫁)하였다. 

비록 가난한 살림에 적은 농토(農土)이긴 했지만 그런 대로 5남매(男妹)의 자녀(子女)를 알뜰하게 키우며, 행복(幸福)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김여사(金女史)의 집안에 액운(厄運)이 덮이기 시작한 것은 시모(媤母)님이 위암(胃癌)으로 드러누우신 후(後)부터 였다. 

시모(媤母)님의 발병(發病) 당시인 1975년(年)부터 3년(年) 7개월(個月) 동안, 김여사(金女史)가 겪어온 간병(看病)의 생활(生活)은 그야말로 암환자(癌患者) 못지 않는 고통(苦痛)이었다.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환자(患者)의 신음(呻吟)소리를 온종일 들으면서 간병(看病)하는 일도 고역(苦役)스런 일이었지만, 매일(每日)같이 대소변(大小便)도 받아내야 하고 미음도 쉴 새 없이 끓여 드려야 했다. 

하지만 김여사(金女史)의 정성(精誠)도 외면(外面)한 채 끝내 시모(媤母)님은 건강(健康)을 회복(恢復)하지 못하고 1978년(年)에 별세(別世)하였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지만, 애통(哀痛)에 못 이기며 시모(媤母)님께 못다한 자신(自身)의 효성(孝誠)을 한탄(恨歎)하면서도, 마음의 안정(安定)을 되찾으려고 애쓰는 즈음 시모(媤母)님의 별세(別世) 1개월 후(個月後) 슬픔에 잠겨 나날을 보내시던 시부(媤父)님께서 시장에 갔다오는 길에 술을 마시고 귀가(歸家) 하던 중 다리에서 추락(墜落)하게 되었다. 

병원(病院)에 입원(入院)한 시부(媤父)님은 척추마비(脊椎痲痺)란 진단(診斷)을 받고 병상생활(病床生活)을 하게 되었다. 

몇 달 후(後)엔 퇴원(退院)했지만 척추마비증세(脊椎痲痺症勢)는 사고(事故) 당시보다 조금도 나아진 것은 없고 막대(莫大)한 병원비(病院費)로 부채(負債)만 남긴 채였다. 

전혀 기동(起動)이 불가능(不可能)한 시부(媤父)님의 간병(看病)은, 암(癌)으로 별세(別世)한 시모(媤母)님 때보다 더 큰 어려움이 뒤따랐다.

여자(女子)인 자부(子婦)의 몸으로 시부(媤父)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낼 때는 살얼음 위를 걷는 듯, 시부(媤父)님의 몸을 조심스럽게 이리저리 옮겨가며 용변(用便)을 보도록 하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 목욕(沐浴)을 시킬 수 없기 때문에 매일(每日)같이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아 드려야 했고, 간난 애처럼 일일이 김여사(金女史)의 손길이 닿아야 했다.

간병(看病)하는 일이 너무나 힘에 겨워 김여사(金女史) 자신(自身)이 몇 번이나 쓰러질 뻔 했다. 

그럴 때마다 "이럴수록 용기(勇氣)를 내야 한다. 나마저 쓰러지면 불쌍한 시부(媤父)님은 누가 돌볼 것인가?"하고 이를 악물며 더욱 힘을 내어 간병(看病)에 3년(年)이 지난 후 시부(媤父)님은 혼자 힘으로, 비록 방 안에서나마 용변(用便)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건강 (健康)이 회복(回復)되었다. 

이에 김여사(金女史)는 시부(媤父)님의 쾌유(快癒)를 위하여 더욱 성실(誠實)히 노력(努力)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동네 주민(住民)들은 모두가 효부(孝婦)라 칭송(稱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