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권영순(權寧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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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1982년 4월 13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천군 화산면
효부(孝婦) 권영순(權寧順) 51세

권영순(權寧順) 여사(女史)는 15세(歲)의 어린 나이에 중매(仲媒)로 부모(父母)가 정(定)해 주신 대로 소아마비(小兒痲痺)로 지체(肢體)가 부자유(不自由)스런 이희동씨(李熙東氏)와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게 되었다. 

그의 시가(媤家)는 고령(高齡)의 시조부모(始祖父母)님이 생존(生存)해 계셨을 뿐 아니라, 여주이씨(驪州李氏)의 종가(宗家)인 관계로 그의 시집살이는 매우 엄격(嚴格)한 규율(規律)속에서 매사(每事)에 신경(神經)을 써야 하는 어려운 생활(生活)이었다. 

권여사(權女史)가 시집온 후(後) 얼마 되지 않아 시부(媤父)님이 중풍(中風)으로 쓰러지는 친환(親患)을 겪게 되었다. 

그는 만사(萬事)를 뒤로 미루고 시부(媤父)님의 간호(看護)에만 전념(專念)하여, 어린 나이에도 불구(不拘)하고 중년부인(中年婦人) 못지않게 차분한 마음으로 봉양(奉養)함으로써 집안 어른들의 칭찬(稱讚)을 받기도 했다. 

병석(病席)의 시부(媤父)님이 어린 자부(子婦) 권여사(權女史)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에 감복(感服)하여, 자부(子婦)의 시탕(侍湯)이 아니면 약(藥)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지극(至極)한 간호(看護)에도 불구하고 시부(媤父)님이 유명(幽明)을 달리하게 되었고, 뒤이어 노환(老患)으로 신음(呻吟)중(中)인 시조부모(始祖 父母)님이 그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시부모(老媤父母)님의 간병(看病) 역시 하루 몇 차례에 걸친 대소변(大小便) 처리(處理)와 목욕(沐浴) 등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는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하였다. 

그러나 백약(百藥)이 무효(無效)하여 병세(病勢)는 조금도 회복(恢復)의 기미(氣味)가 보이지 않더니, 9년(年)이란 세월(歲月)동안에 웃어른들이 한 분, 한 분, 세상(世上)을 등지고 말았다. 

그런데 불행(不幸)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웃어른들을 여윈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前)에 소년(少年)이던 시(媤)동생이 폐결핵(肺結核)으로 눕게 되었다. 

권여사(權女史)는 또다시 병(病)구완에 전념(專念)해야만 했다. 

어려운 가계(家計)에 약(藥)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안타까움 속에서 폐병(肺病)에 특효(特效)라는 말을 듣고 개구리와 뱀을 산야(山野)를 헤매며 잡아다가 탕(湯)을 만들어, 먹기 싫어하는 시(媤)동생에게 정성(精誠)으로 먹이며 구료(求療)하였다. 

다행이 지극(至極)한 그의 간병(看病)에 보답(報答)이라도 하듯이 시(媤)동생은 4년(年)만에 건강(健康)을 회복(恢復)하게 되었다. 

시(媤)동생이 활짝 웃는 얼굴로 입대(入隊)하던 날, 감격(感激)에 넘쳐 시(媤)동생과 권여사(權女史)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한다. 

가장(家長)이 생활능력(生活能力)이 없는 불구자(不具者)였기에 권여사(權女史)는 가장(家長) 구실도 해야 했다. 

장정(莊丁)도 힘겨워 하는 지게질이나 쟁기질은 물론, 온갖 힘든 일을 마다 않고 최선(最善)을 다했다. 

또한 하체(下體)가 불자유(不自有)스런 남편(男便)을 위해서는 '사랑의 지팡이'구실까지 해 오면서 지금껏 단 한 번도 얼굴을 찡그려 본 일이 없을 만큼 남편(男便)을 하늘처럼 섬겨 왔다. 

1981년(年)에는 국무총리(國務總理)로부터 '장(壯)한 어머니상(賞)'을 받기도 했던 권여사(權女史), 그야말로 효행(孝行)과 열행(烈行)을 겸비(兼備)한 자랑스런 여인상(女人像)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