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임말연(林末連) 여사(女史)는 25년 전(年前) 이상락씨(李尙洛氏)와 결혼(結婚)한 후, 지금껏 만성관절염(慢性關節炎)으로 기동(起動)이 부자유(不自由)스러운 시모(媤母)님 구환(救患)을 지성(至誠)껏 해 오면서, 슬하(膝下)의 6남매(男妹)를 뒷바라지해 오고 있다.
임여사(林女史)의 남편(男便)인 이씨(李氏)는, 타고난 가산(家産)이라고는 야산(野山) 개간지(開墾地)인 1,000여평(餘坪)의 밭뿐이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매일(每日)같이 무위도식(無爲徒食)하고 있었다.
따라서 임여사(林女史)는 스스로 가장(家長)의 책무(責務)를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쪼들리는 가난과 온갖 역경(逆境)속에서도 좌절(挫折)하지 않고 실의(失意)를 딛고 성실(誠實)히 큰아들과 함께 농토(農土)를 가꾸며 날품팔이로 생계(生計)를 이어나갔다.
그러한 어려운 생계(生計)를 하루하루 꾸려가면서도 언제나 따뜻한 인정(人情)과 성실(誠實)한 노력(努力)으로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나날의 어려운 생계(生計)를 꾸려가며 가정(家庭)의 화목(和睦)을 위해 힘써 왔다.
그런 가운데, 지금으로부터 25년 전(年前) 시모(媤母)인 윤우연(尹偶然) 당년(當年) 76세(歲) 노파(老婆)가 만성관절염(慢性關節炎)으로 병상(病床)의 몸이 되자, 불구(不具)인 시모(媤母)님을 위해 때로는 발이 되고 때로는 손이 되어서 정성(精誠)껏 받들어 모셨다.
25년간(年間)을 하루같이 병석(病席)에 있는 시모(媤母)님의 용변처리(用便處理)에서부터 목욕(沐浴), 옷 갈아입히기 등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해야 했으며, 식사(食事)도 한 숟갈, 두 숟갈 떠 드려야 했고, 잠자리에 들 때도 임여사(林女史)의 부드러운 손길이 필요(必要)했다.
간혹 고기반찬이라도 마련되는 날이면, 6남매(男妹)의 자녀(子女)들을 모두 밖으로 쫓아버린 뒤, 시모(媤母)님의 밥상에만 특별(特別)히 올려놓을 만큼 그의 효심(孝心)은 두텁기만 하였다.
추운 겨울 시모(媤母)님의 방(房)에 한기(寒氣)라도 돌면 자신(自身)이 덮고 있는 이불을 덮어 드린 후(後) 임여사(林女史)는 떨면서 밤을 새운 일도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하루가 다르게 살림은 쪼들려 들어가 가난은 더해 갔지만, 무능(無能)하고 방탕(放蕩)한 생활(生活)로 허송세월(虛送歲月)만 하고 있던 남편(男便)은, 임여사(林女史)의 정성(精誠)어린 마음에도 아랑곳없이 '먼 산의 불구경'하듯이 가정(家庭)을 외면(外面)하였다.
그러나 임여사(林女史)의 남편(男便)에 대한 공경심(恭敬心)은 언제나 변함없었으며, 불평(不平)한 마디 없이 늘 따뜻한 미소(微笑)로 남편(男便)을 대하였다.
이러한 딱한 사정(事情)을 알고 있는 인근주민(隣近住民)들까지 "벙어리처럼 점잖게 있지만 말고, 남편(男便)이 알아듣도록 따끔하게 말을 하라."고 충고(忠告)를 할 때도 있었지만, 임여사(林女史)는 언제나 "미우나 고우나 남편(男便)은 하늘이다."라는 말로 대답(對答)을 대신(代身)하곤 하였다.
강산(江山)이 두 번이나 변(變)하는 25년간(年間)을, 한 시(時)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시모(媤母)님에 대한 극진(極盡)한 간병(看病)과 가정(家庭)의 생계(生計)를 위해 노력(努力)하고 있는 임여사(林女史)야말로, 요즘 보기 드문 효부(孝婦)이며, 뭇사람들의 귀감(龜鑑)이라 하겠다.
- 이전글제25회 독행상(篤行賞) 김종해(金鍾海) 25.05.16
- 다음글제25회 독행상(篤行賞) 성태분(成泰粉) 25.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