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황옥분(黃玉粉)

페이지 정보

본문

제25회(1982년 4월 13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안동군 풍산읍
효부(孝婦) 황옥분(黃玉粉) 52세

황옥분(黃玉粉) 여사(女史)는 평해황씨(平海黃氏)로, 전통적(傳統的)인 유교가정(儒敎家庭)에서 일찍부터 삼강오륜(三綱五倫)과 삼종지도(三從之道)와 같은 부덕(婦德)을 배우면서 자랐다. 

16세(歲)의 어린 나이로 김해김씨(金海金氏) 집안에 출가(出嫁)한 그는, 청빈(淸貧)한 선비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위로는 조상(祖上)의 제례(祭禮)와 시부모(媤父母)님의 봉양(奉養)에 힘을 쏟으면서, 5형제(兄弟) 7자매(姉妹)를 보살펴야 하는 상봉하솔(上奉下率)의 입장(立場)에 서게 되었다. 

800여평(餘坪)에 불과(不過)한 전답(田畓)을 경작(耕作)하여 대식구(大食口)가 함께 먹고 살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나름대로 행복(幸福)도 느끼면서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갔다. 

그러나 몇 년후(年後) 원한(怨恨)의 6.25 동란(動亂)의 혼란(混亂) 속에서, 당시(當時) 서울 한전(韓電)에 근무(勤務)하던 남편(男便)이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되면서부터 황여사(黃女史)는 견디기 힘든 시련(試鍊)을 겪기 시작하였다. 

결혼(結婚) 몇 년(年)만에 생과부(生寡婦)가 된 황여사(黃女史)는, 매일(每日)같이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생사(生死)조차 모르는 남편(男便)이 돌아오길 빌어왔지만, 32년(年)이 지난 지금까지 남편(男便)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1960년(年)에는 시부(媤父)님이 중병(重病)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황여사(黃女史)는 하루 100여리(餘里)의 험(險)한 산길을 오가며 읍내(邑內) 약방(藥房)에서 약(藥)을 지어 오는 등 10수년(數年)동안 정성(精誠)을 다해 구환(救患)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그의 구환(救患)의 보람도 없이 시부(媤父)님은 발병(發病) 18년(年)만에 결국 별세(別世)하시고 말았지만, 그 동안 시부(媤父)님께 바쳐진 황여사(黃女史)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눈물이 나게 할 정도(程度)였다고 한다. 

이과같은 어려운 여건(與件)속에서도, 시(媤)동생과 시(媤)누이를 차례로 성혼(成婚), 출가(出嫁)시켜 모두를 단락(團樂)한 가정(家庭)도 꾸미게 해 주었고, 남은 식구(食口)들을 위해서도 항상 자애(慈愛)를 아끼지 않았다. 그 후(後) 1981년(年)에는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시모(媤母)님이 복막염(腹膜炎)으로 입원(入院), 수술(手術)을 받으신 후 노환(老患)으로 병석(病席)에 누우신 적이 있으나, 워낙 극진(極盡)한 며느리의 간호(看護) 덕분(德分)으로 거뜬히 회복(恢復)하여, 지금까지도 건강(健康)을 유지(維持)하면서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현재(現在)는 77세(歲)의 시모(媤母)님과 본인(本人), 그리고 금년(今年)에 결혼(結婚)시킨 양자(養子)(김 규환)가 신부(新婦)를 남겨 둔채 구직차(求職次) 출타(出他)하고, 3대(代)의 부인(婦人)네만 쓸쓸하게 초라한 집을 지키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6.25 동란(動亂)으로 일찌기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된 부군(夫君)을 32년여(年餘)의 긴 세월(歲月)동안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리면서, 오직 시부모(媤父母)님의 병(病)구완과 시봉(侍奉)에 바친 황여사(黃女史)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차츰 주변(周邊)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의 칭송(稱頌)과 추천(推薦)으로 1970년(年) 10월(月)에는 예천(醴泉) 천무회장으로부터 효부표창(孝婦表彰)을 받았고, 예천군수(醴泉郡守)로부터 표창장(表彰狀)을 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