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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무임(尹武任) 여사(女史)는 40여년 전(餘年前) 김동화씨(金炯嘩氏)와 결혼(結婚)하였다.
가세(家勢)는 넉넉하지 못하였으나 시부모(媤父母) 모시고 남편(男便)과 오붓하게 살았다.
결혼(結婚)한 지 1년(年)만에 남편(男便)은 돈벌이하러 일본(日本)으로 건너갔다. 아이 하나 없는 새색시였기에 그 이별(離別)의 아픔은 말할 수 없이 괴로웠으나, 웃음으로 남편(男便)을 보고 "뒷일은 염려(念慮)하지 마시오." 하고 보냈으나, 떠난 뒤로는 이자소식(一字消息)이 없었던 것이 지금까지 40여년(餘年)이 흘렀다.
처음에는 소식(消息)을 기다려도 보고 원망도 하였으나 운명(運命)으로 체념(諦念)하고, 자식(子息)을 기다리는 시모(媤母)님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느냐고 하며, 자신(自身)의 마음을 달래고 오히려 시모(媤母)님을 위로(慰勞)하였다.
시모(媤母)님은 불쌍한 며느리에게 개가(改嫁)를 권유(勸誘)하였으나, 윤여사(尹女史)는 번번이 완강(頑强)히 이를 거절(拒絶)하고, 마음 속으로 불편이심(不便二心)를 다짐하였다.
의지(依支)할 곳 없는 시모(媤母)님의 벗이 되고 서로 위로(慰勞)하며 어려운 살림으로 혼자 힘으로 꾸려 나갔다.
세월(歲月)은 흘러 시모(媤母)님은 80 고령(高齡)이 되어 출입(出入)이 어렵게 되고, 자신(自身)도 이순(耳順)이 넘어 이제는 65세(歲)의 노부인(老婦人)이 되었다.
한(恨)도 많았던 한 평생(平生)이었으나, 시모(媤母)님을 버릴 수 없어 자신(自身)을 희생(犧牲)한 것이 오히려 보람스럽고 자랑스럽고 떳떳하다고 하였다.
매일(每日) 계속(繼續)되는 날품팔이가 생활수단(生活手段)이었으나, 불쌍한 시모(媤母)님이 웃으며 위로(慰勞)하고 잡아 주는 손길에서, 지친 피로(疲勞)가 한꺼번에 풀리곤 했다 한다.
이웃의 잔치나 뜻밖에 얻어지는 음식물(飮食物)이 있으면, 자신(自身)이 먹는다고 것은 아예 생각해 보지도 못했고, 시모(媤母)님에게 먼저 갖다 드리는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즐거웠다 한다.
이러던 중 10년전(年前)에 상처(喪妻)한 시(媤)동생이, 4년전(年前)에 자식(子息)들 4남매(男妹)를 맡겨 놓고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되었으니 가난의 극(極)에 선 것이 윤여사(尹女史)의 처지(處地)이다.
의지(依支)할 곳 없는 이들을 도맡아 친자식(親子息)처럼 양육(養育)하고 있다.
이제는 여생(餘生)이 얼마 남지 않는 시모(媤母)님을 하늘같이 모시고, 외로운 나날에 말벗이 되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마음 쓰는 것만이 윤여사(尹女史)가 해야 할 사명(使命)으로 알고, 부모(父母)없이 자라고 있는 조카 자식(子息) 4남매(男妹)도 그늘지지 않고 밝고 명랑(明朗)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빌며, 있는 정성(精誠)을 다하여 양육(養育)하고 있다.
혈육(血肉) 한 점 없이 1년(年)을 같이 지낸 남편(男便) 때문에, 시부모(媤父母)님을 봉양(奉養)하기 위하여 청춘(靑春)을 불살라버린 윤여사(尹女史)야말로, 메마른 세정(世情)과 타락(墮落)된 윤리(倫理) 속에서는 보기 드문 효부(孝婦)이고 열녀(烈女)라 아니할 수 없다.
이웃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몰인정(沒人情)한 오늘의 현실(現實)이지만, 윤여사(尹女史)의 고귀(高貴)한 희생정신(犧牲精神)은 이웃에 그 칭송(稱頌)이 자자하다.
과거(過去)처럼 효열(孝烈)을 숭고(崇高)하던 때였더라면 나라에서는 분명히 정려(旌閭)가 내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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