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가산(家産)이라곤 초가(草家) 1동(棟)과 전답(田畓) 400평(坪)뿐인 영세농가(零細農家)에 출가(出嫁)한 유복열(柳福烈) 여사(女史)는, 시집온 그 날부터 가난을 숙명(宿命)처럼 여기면서 살아야만 했다.
시모(媤母)님은 지성(至誠)껏 모시면서 남편(男便)과 더불어 매일(每日)같이 품팔이 등 고된 농사(農事)일로 하루 하루를 이어온 그는, 때로는 가난에 지치고 지쳐 남모르게 안타까운 눈물을, 흘릴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與件)속에서도 시모(媤母)님을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하는 그의 정성(精誠)은 놀랍기만 했는데, 시모(媤母)님이 어디가 조금이라도 괜찮으면 밤새 꼬박 곁에 지켜 앉아서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기도 했고, 또한 시모(媤母)님 구미(口味)에 맞는 음식(飮食)을 마련해 드리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마을 구석구석까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알고 있는 정도(程度)였다.
뿐만 아니라 남편(男便)에 대(對)한 존경심(尊敬心)과 자녀(子女)들에 대한 사랑도 놀라와 마음 사람들로부터 항상 칭찬(稱讚)을 받아 온 그는, 일가친척(一家親戚)은 물론(勿論), 마을 사람 모두에 이르기까지 '인정(人情) 많은 아줌마'로 통(通)할 만큼, 유여사(柳女史)는 남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 태어난 사람만 같았다.
시모(媤母)님이 별세(別世)하던 날, 며느리인 유여사(柳女史)의 손을 꼭 잡고 "참말로 고맙다."라는 유언(遺言) 한 마디와 함께 영결(永訣)의 눈물을 흘렸다는 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의 효심(孝心)은 불길처럼 뜨겁기만 하였다.
그 후(後) 유여사(柳女史)는 의지(依支)할 곳 없이 홀로 지내던 반신불수(半身不隨)의 시재종숙(媤再從叔)인 고희(古稀)의 손(孫)위진씨(氏)를, 친부모(親父母) 모시듯 지금까지 자기(自己)집에서 매일(每日)같이 따뜻한 식사(食事)를 대접(待接)하는 한편, 그가 좋아하는 술과 담배도 끊임없이 대어 드리는 등 친자부(親子婦) 이상(以上)으로 지성(至誠)으로 보살펴 드렸다.
어디 그뿐이랴, 시재종숙(媤再從叔)이 기거(起居)하는 방(房)에는 먼지 하나 없을 만큼 항상(恒常) 깨끗하게 청소(淸掃)를 했으며, 온갖 궂은 빨래도 싫은 표정(表情) 한 번 짓지 않고, 항상(恒常) 웃음 띤 얼굴로 하곤 하였다.
시재종숙(媤再從叔)은 간혹(間或)옷이나 이불에 자신(自身)도 모르게 방뇨(放尿)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유여사(柳女史)는,"오늘 더 멋진 지도(地圖)를 그려 놓으셨네요."하면서 몹시 미안(未安)해 하는 시재종숙(媤再從叔)을 오히려 상냥한 미소(微笑)위로(慰勞)하는 등, 따뜻한 그의 인간미(人間味)는 아름다운 꽃처럼 향기(香氣)롭기만 하였다.
잔치집에서 맛있는 음식(飮食)이 생기면 그것을 챙겨 뒀따가 자식(子息)들보다 외로운 시재종숙(媤再從叔)에게 갖다 드리는 따뜻한 인간애(人間愛)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유여사(柳女史)의 박애(博愛)와 봉사정신(奉仕精神)은 온 마을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존경(尊敬)을 받으려면 남에게 이익(利益)을 주어야 하고, 애정(愛情)을 받으려면 남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말도 있듯이 유여사(柳女史)가 시재종숙(媤再從叔)에게 베풀고 있는 사랑이야말로, 시재종숙(媤再從叔)에게 이익(利益)과 기쁨을 함께 주는 거룩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랴.
시부(媤父)도 아닌 시재종숙(媤再從叔)에게 사랑이란 정성(精誠)을 다 바치고 있는 유여사(柳女史) 오늘도 그는 시재종숙(媤再從叔)에게 출필고(出必告), 반필면(反必面)의 예절(禮節)을 잊지않고 일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이전글제24회 독행상(篤行賞) 박정자(朴貞子) 25.05.15
- 다음글제24회 독행상(篤行賞) 최재흥(崔在興) 25.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