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박정자(朴貞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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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1981년 4월 11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김천시 남산동
선행(善行) 박정자(朴貞子) 38세

2남(男) 1녀(女)의 어머니이기도 한 박정자(朴貞子) 여사(女史)는, 독실(篤實)한 청주교신자(天主敎信者)로서 성경(聖經)에 새겨진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성구(聖句)를 몸소 실천(實踐)에 옮기고 있는 "사랑의 천사(天使)라고 할 수 있겠다. 

위로는 시모(媤母)님과 남편(男便)을 극진히 모시면서 자녀교육(子女敎育)에도 전심전력(全心全力)을 다해 오고 있는 박여사(朴女史)는 지금껏 불우(不遇)한 이웃을 알게 모르게 헌신적(獻身的)으로 도와 왔는데, 그 몇 가지 공적(功績)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 해 6월(月) 남산동(南山洞) 172번지(番地)에 거주(居住)하는 김달용씨댁(氏宅)에 세(貰)들어 살면서 막 노동(勞動)으로 근근 생계(生計)를 이어오던 박봉래씨(氏)가 병환(病患)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그의 처(妻)마저 정신이상자(精神異常者)가 되는 등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것을 딱하게 여긴 박여사(朴女史)는, 수시(隨時)로 그 집을 찾아가서 가사일절(家事一切)을 돌봐주는 등 뒷바라지를 해 주었으며, 또 같은 해 7월(月)에는 역시 남산동(南山洞) 197번지(番地)에 살고 있는 김성배씨(氏)는 부인(夫人)을 잃고 매일(每日)같이 술독에 빠져 실의(失意)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린 4남매(男妹)를 남겨 놓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하루아침에 고아(孤兒)가 되어 버린 어린이들은, 매일(每日)같이 울부짖으며 비정(非情)의 아버지를 찾고 있었는데, 이들의 딱한 사정(事情)을 알게 된 박여사(朴女史)가 매일(每日)같이 찾아가서 목욕(沐浴)시키는 일부터 이발(理髮), 세탁, 심지어 옷과 이불까지 사다가 입혀 주고 덮어 주는 등 그의 끝없는 사랑의 손길은 눈물겨울 정도(程度)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장염(腸炎)으로 생명(生命)이 위급(危急)한 장상욱씨(氏)를 김천(金泉)에서는 수술(手術)이 불가능(不可能)해서 급(急)히 택시를 대절(貸切)하여 대구(大邱)까지 동행(同行)한 후(後) 무사(無事)히 수술(手術)을 끝내게 함으로써 귀중(貴重)한 생명(生命)을 건져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입원비(入院費)가 없어 눈물만 짓고 있는 중환자(重患者) 장태술씨(氏)에게도 마을금고(金庫)에서 20만(萬)원을 차용(借用)하여 입원수속(入院手續)을 밟도록 해 주었다. 

이 밖에도 지난 12월(月)에는 쌀, 보리, 김치 등을 마련하여 남산동(南山洞) 68번지(番地)에 거주(居住)하는 극빈자(極貧者) 김정숙씨(金正淑氏)에게 전(傳)해 주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이랴, 외롭게 살다가 죽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장례(葬禮)를 도맡아 처리(處理)하는 등, 그의 숨은 인간애(人間愛)야 말로 사랑의 천사(天使) 그것이었다. 

각박(刻薄)하고 냉염(冷炎)한 세파(世波)속에서도, 항상 예절(禮節)이 바르고 부지런하며 특(特)히 나보다 남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犧牲)하고 있는 박여사(朴女史)는, 오늘도 자신(自身)의 가사(家事)일보다는 불우(不遇)한 이웃들을 돌봐 주기 위하여 밖으로 뛰어 나갔다. 

'사랑, 믿음, 소망(所望)'이 그의 생활신조(生活信條)라고 말하는 박여사(朴女史). 

오죽했으면 그의 남편(男便)도 집안 일은 돌보지 않고 밖으로만 헤매고 있는 마누라에게 '고아원장(孤兒院長)','양로원장(養老院長)'이라는 별명(別名)을 붙여 주기까지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