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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8년전(年前)에 결혼(結婚)한 서월수(徐月秀) 여사(女史)는, 결혼후(結婚後) 3~4년간(年間)은 시부모(媤父母)님과 남편(男便)의 사랑을 받으며, 나름대로 행복(幸福)된 나날을 보냈지만, 그 후(後)가 비극(悲劇)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일절(一切)의 농사(農事)일을 외면(外面)하고 매일(每日)같이 눈만 뜨면 술과 도박(賭博)으로 세월(歲月)을 보내는 남편(男便)은 그것도 부족(不足)하여 행패(行悖)까지 부렸다.
그즈음 시부모(媤父母)님은 노환(老患)으로 와병 중(臥病中)이었고, 시(媤)동생과 시(媤)누이가 각기(各其) 결혼연령(結婚年齡)에 달(達)해, 서여사(徐女史)의 고민(苦悶)은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程度)로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같다.
남편(男便)은 술과 도박(賭博)은 더욱 심(甚)해져 급기야는 논밭까지 뺏기는 비극(悲劇)을 맞게 되었다.
서여사(徐女史)는 9명(名)의 대가족(大家族)을 살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그 날부터 날품팔이 현장(現場)에 뛰어들어 중노동(重勞動)을 하기 시작하였다.
서여사(徐女史)는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나 힘겹기만 하기에 남편(男便)을 붙잡고 눈물로 호소(呼訴)해보았으나, 그럴 때마다 남편(男便)은 손찌검까지 하면서 온 가족(家族)을 공포(恐怖)의 도가니로 몰아넣곤 했다.
그러나 서여사(徐女史)는, 가정(家庭)을 일으키고 남편(男便)을 올바른 길로 인도(引導)해야겠다는 불타는 일념(一念)으로 매일(每日)같이 구타(毆打)를 당(當)하면서도 끈덕지게 남편(男便)을 붙잡고 설득(說得)하였다.
더우기 노환(老患)으로 시모(媤母)님도 병석(病席)에 눕게 되어 서여사(徐女史)의 손길은 더욱 바빠졌지만, 그가 하던 날품팔이는 계속(繼續) 이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특(特)히 일이 없는 농한기(農閑期)에는 콩나물과 두부행상(行商)을 하면서 돈을 벌기도 했고, 양송이 재배공장(栽培工場)에 나가서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을 하기도 했다.
그의 이와 같은 고생(苦生)도 아랑곳 않고 남편(男便)은 이제 알콜중독(中毒)에 가까울 정도(程度)로 아침부터 술독에서 살았고, 또한 노름판에서 밤을 꼬박 새우는 일이 더욱 늘어만 갔다.
이 꼴을 보다 못한 서여사(徐女史)는 술집과 노름판을 찾아가서 무릎을 끓고 울면서 애원(哀願)도 해 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얼굴이 터지고 머리가 깨지는 등 심(甚)하게 구타(毆打)를 당(當)하고 집에 돌아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편(男便)의 행패(行悖)가 오죽 심(甚)했으면, 1978년(年) 1월(月), 큰아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알몸으로 손, 발을 묵고 몽둥이로 아들을 때려 죽이는 비인간적(非人間的)인 행패(行悖)까지 부렸으랴!
서여사(徐女史)는 순간(瞬間) 너무나 어이가 없어 무섭고 비정(非情)한 남편(男便)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날 밤 그의 남편(男便)은 눈물을 흘리면서 사과(謝過)하고 다음 날 아침 양심(良心) 가책(呵責)을 받았던지 농약(農藥)을 마시고 자살(自殺)함으로써 비극(悲劇)의 막(幕)은 내려졌다.
서여사(徐女史)는 비정(非情)의 남편(男便)이 한(限)없이 원망(怨望)스럽고 비통(悲痛)하였으나 슬픔을 뛰어넘고, 나이 어린 자식(子息)을 키우면서 시모(媤母)님의 병(病)구완으로 억척스럽게 모진 역경(逆境)과 싸워가면서 살아왔으나, 3년간(年間)의 극진(極盡)한 간병(看病)의 보람도 없이 1980년(年) 8월(月) 시모(媤母)님은 세상(世上)을 떠나시고, 이제 그에게는 3명(名)의 자녀(子女)와 그리고 또 다시 들이닥칠 가난과 허탈감(虛脫感)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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