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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복수(廉福水) 여사(女史)는 16세(歲) 결혼(結婚)하여 23세(歲)때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한 청상과부(靑孀寡婦)로서, 재혼(再婚)의 권유(勸誘)와 유혹(誘惑)을 물리치고 지금껏 남편(男便)의 환상(幻像)만을 그리면서 살아온 기개(氣槪) 높은 수절여인(守節女人)이다.
그의 남편(男便)도 6.25의 제단(祭壇)에 바쳐진 전사자(戰死者)였는데, 그 때 염여사(廉女史)의 나이는 23세(歲)의 꽃다운 나이었다.
"아까운 청춘(靑春)을 헛되어 썩히지 말고 개가(改嫁)해서 새 행복(幸福)을 찾으라."고 말하는 주위(周圍)사람들의 충고(忠告)도 아랑곳 않고, 시부모(媤父母)님과 유자녀(遺子女)들을 위해 수절(守節)키로 굳게 결심(決心)한 염여사(廉女史)는, 남편(男便)이 남기고 간 1,000여평(餘坪)의 농토(農土)에다 심혈(心血)을 쏟으며 하루 하루를 희망(希望)찬 새 날로 맞으면서 살아갔다.
더우기 시부모(媤父母)님은 연로(年老)한 탓으로 모든 농사(農事)일을 그 자신(自身)이 도맡아서 꾸려가지 않았으면 안되었는데, 하나뿐인 시(媤)동생은 다 지어 놓은 밥솥에다 재만 뿌리고 다닌다고나 할까. 농토(農土)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면서 매일(每日)같이 방탕(放蕩)한 생활(生活)로 형수(兄嫂)의 심정(心情)을 괴롭혔다.
그것뿐이면 또 괜찮겠는데 툭하면 "형수 시집이나 가슈, 형수(兄嫂)가 시집 안가겠다고 하면 내가 보내 주겠수." 이와 같은 말과 함께 악담(惡談)까지 늘어놓으면서 그를 괴롭혔다.
끝내 시모(媤母)님은 맏아들의 전사(戰死) 그리고 둘째 아들의 방탕(放蕩), 이런 요인(要因)들로 말미암아 울화병(鬱火病)으로 타계(他界)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비극(悲劇)도 아랑곳 않는 시(媤)동생의 행패(行悖)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는데, 어느 날 하루는 "이것 봐 형수(兄嫂), 시집갈 거야 안 갈거야."하면서 노골적(露骨的)으로 재혼(再婚)을 강요(强要)하기도 했는데 보다 못한 염여사(廉女史)는, 하는 수 없이 연로(年老)한 시부(媤父)님을 모시고 고향(故鄕)을 떠나 객지(客地)에서 전전(轉轉)하게 되었다.
경주(慶州) 인근(隣近)에 세방(貰房)을 얻고, 다시 가족(家族)들의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위해 행상(行商)길에 나선 그는, 굶주린 창자를 이기다 못해 몇 번이나 길거리에서 실신(失神)한 일도 있었는데, 이 때 식수(食口)들은 매일(每日)같이 국수로 허기진 배를 채울 정도(程度)로 그의 생활(生活)은 말이 아니었지만, 시부(媤父)님께만은 꼭 쌀밥으로 밥상(床)을 차려 드렸다.
이와 같은 고난(苦難) 속에서도 자식교육(子息敎育)에는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으니, 두 아들 모두 고등학교(高等學校)를 거쳐 이제는 훌륭한 산업전사(産業戰士)로서 사회(社會)에 기여(寄與)하고 있다.
23세(歲)의 청춘(靑春)에서 51세(歲)의 노경(老境)으로 접어들게 된 염여사(廉女史)는, 남편(男便)이 전사(戰死)한 후(後) 지금껏 28년(年) 동안을 오로지 남편(男便)의 넋을 기리며 수절(守節)해 온 장(壯)한 아내로서, 그가 지닌 효(孝)와 열행정신(烈行精神)은 모든 여성(女性)들의 귀감(龜鑑)이 되고도 남음이 있겠다.
염여사(廉女史)는 비록 학교문전(學校門前)에도 가 보지 못한 무학자(無學者)이긴 했지만, 충(忠), 효(孝), 예(禮)의 실행(實行)만은 누구보다도 앞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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