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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公職)에 있던 남편(男便)의 순직(殉職)으로 하루아침에 자녀(子女) 5명(名) 등 자그마치 10여(餘名)의 대가족(大家族)을 자신(自身)이 거느려야 했던 박달순(朴達順) 여사(女史)는, 남편(男便)이 남기고 간 전답(田畓) 400평(坪)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긴 한숨만 쉬었다.
'손바닥 만한 논밭으로 어떻게 열 명(名)이나 되는 식구들을 먹여 살린담.....'
무엇보다도 박여사(朴女史)는 가난으로 말미암아, 시부모(媤父母)님을 조금이라도 섭섭하게 해드릴까봐 걱정이 태산(泰山)만 같았고, 또한 시(媤)누이들의 장래문제(將來問題)나 자녀(子女)들의 교육문제(敎育問題)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어서, 그의 고민(苦悶)은 날이 갈수록 커가기만 했다.
드디어 그는 농사(農事)일에 뛰어들어 틈틈이 품팔이를 열심(熱心)히 하면서, 사흘이 멀다 하고 병석(病席)에 드는 시부모(媤父母)님의 간병(看病)에도 최선(最善)을 다했다.
시부모(媤父母)님은 노환(老患)이어서 아무리 좋은 약(藥)을 써 보아도 회복(恢復)되는 기미(氣味)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박여사(朴女史)는 더욱 알뜰한 정성(精誠)으로 노부모(老父母)님을 봉양(奉養)하였다.
그의 자녀(子女)들도 어머니의 본을 받아 3남(男) 2녀(女) 모두가 성실(誠實)하고 착하기만 한데, 고생(苦生)하는 어머니 앞에 학기말(學期末)마다 우등상(優等賞)과 모범학생상(模範學生賞) 등 많은 표창장(表彰狀)을 안겨 주는 바람에 박여사(朴女史)는 새삼 용기(勇氣)를 얻고, 아버지 없는 자식(子息)이란 말을 듣지 않게끔 더욱 뒷바라지를 잘해 주었다.
그러던 중 78년(年) 1월(月)에 시부(媤父)님이 오랜 병고(病苦)끝에 별세(別世)하시자 정성(精誠)껏 3년상(年喪)을 치렀는데, 그는 소상(小祥)을 지내고 1년(年)이 지나서 다시 대상(大祥)을 맞게 된 후(後)부터는, 예부터 내려오는 풍습(風習) 그대로 음식(飮食)에 식초와 간장을 넣어 먹는 등, 마음으로나마 가신 웃어른의 넋을 진심(眞心)으로 달래기도 하였다.
박여사(朴女史)는 남달리 자녀(子女)들에 대(對)한 교육열(敎育熱)도 대단했는데, 그는 언제나 자녀(子女)에게 입버릇처럼, "아버지 없는 자식(子息)이란 설움을 씻기 위해서라도 열심(熱心)히 공부(工夫)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해라." 이와 같이 말하면서, 항상 자녀(子女)들의 교육(敎育)에 깊은 관심(關心)을 쏟고 있었다.
이제 자녀(子女)들도 모두 성장(成長)하여 장남(長男)은 고교(高敎)를 졸업(卒業) 한 후 전투경찰(戰鬪警察)에 입대(入隊)했고, 장녀(長女) 역시 고교(高校)를 거쳐 출가(出嫁)했으며, 차녀(次女)는 우등생(優等生)으로 고교(高校)를 나온 후 현재(現在) 가사(家事)에 종사(從事)하고 있다.
그리고 차남(次男)은 선산중학(善山中學)을 졸업(卒業)한 후 고교(高校) 진학준비(進學準備)를 하고 있으며, 삼남(三男)은 중학(中學)에서 열심(熱心)히 공부(工夫)하고 있는 등 자녀(子女) 모두를 훌륭하게 키워 나가고 있다.
여자(女子) 혼자의 힘으로 한 가정(家庭)을 굳건히 지탱해 온 박여사(朴女史)는 지금도 노환(老患)으로 병상(病床)에서 신음중(呻吟中)인 시모(媤母)님을 극진(極盡)히 돌보면서, 품팔이 노동(勞動)으로 자녀(子女)들을 열심(熱心)히 키워 가고 있다.
1978년(年) 5월(月) 어버이날에 봉천국민학교에 장(壯)한 어버이 상(賞)을 받기도 한 박여사(朴女史)는, 그가 배우지 못한 아쉬움을 자녀(子女)들에게는 되풀이 않겠다는 굳은 의지(意志)로, 그의 교육열(敎育熱)은 불덩이처럼 더욱 뜨겁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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