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양순남(梁順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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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1981년 4월 11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청도군 화양읍
효부(孝婦) 양순남(梁順南) 58세

양순남(梁順南) 여사(女史)의 일생(一生)은 고난(苦難)과 역경(逆境)으로 점철(點綴)된 파란만장(波瀾萬丈)의 나날이었다고 해도 과언(過言)은 아닐 만큼, 19세(勢)에 시집가서 신혼초기(新婚初期)부터 그의 생활(生活)은 줄곧 고난(苦難)의 가시밭길 그것이었다. 

푸른 꿈을 안고 그가 시가(媤家)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를 맞이한 사람들은 남편(男便) 외(外)에도 노시모(老媤母)님을 비롯하여 중풍(中風)으로 활동(活動)을 못하는 홀아비 시숙(媤叔), 그리고 산후병(産後病)으로 어린것들을 남겨둔 채 사망(死亡)한 손위 동서(同壻)의 6남매(男妹) 등, 시댁(媤宅)은 마치 고아원(孤兒院)만 같은 분위기(雰圍氣)였다. 

가재도구(家財道具)라곤 부엌의 그릇 몇 점(點)뿐, 100여명(餘名)의 대가족(大家族)이 불과(不過) 300평(坪)의 천수답(天水畓)에다 목숨을 걸어 놓고 있는 찢어지게도 가난한 농가(農家)였다. 

어려운 생계(生計)를 돕기 위해서 남편(男便)이 날품팔이로 나서서 구슬땀을 흘리며 열심(熱心)히 일했지만 그것으로는 생활(生活)은 어렵기만 하여 시숙(媤叔)의 중병(重病)에 약(藥)한 첩 살 수 없는 딱한 처지(處地)였다. 

견디다 못한 양여사(梁女史)는 신혼(新婚)의 꿈도 내동댕이친 채, 시집온 지 며칠 후부터 모내기, 보리타작, 방아찧기 등, 손에 닥치는 대로 막 노동(勞動)을 하면서 시숙(媤叔)의 병환(病患)과 어린 조카들을 정성(精誠)껏 보살폈다. 

그러나 시숙(媤叔)은 햇볕을 보지 못하고 별세(別世)했지만, 이번에는 또 시모(媤母)님이 중풍(中風)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되는 바람에 그의 손길을 또다시 바쁘게 되었다.

매일(每日)같이 하루에 몇 차례에 걸쳐 받아내는 대소변(大小便) 처리(處理)를 비롯해서 빨래와 목욕(沐浴)시키기 등, 양여사(梁女史)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은 놀라울 정도(程度)였다. 

어디 그뿐이랴, 6명(名)에 달(達)하는 조카들을 뒷바라지도 엄청나게 큰 중노동(重勞動)이었지만, 그는 모든 것을 운명(運命)으로 돌리고 가난한 간병(看病) 등 어려운 문제(問題)를 단(單) 한 마디의 불평불만(不平不滿)도 없이 차분하게 풀어나갔다. 

그가 병(病)든 시모(媤母)님을 위하는 마음은 정성(精誠)스럽기만 했는데, 예(例)를 들면 시모(媤母)님이 간혹 중풍(中風)에다 독감(毒感)까지 겹쳐 신음(呻吟)할 때는 밤을 꼬박 새우면서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기도 했고, 특(特)히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엄동설한(嚴冬雪寒)에는 자신(自身)이 덥고 있는 이불마저 시모(媤母)님께 덮어 드린 후, 그는 밤새 오들오들 떨면서 한겨울을 보낸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리만큼, 15년간(年間)에 걸친 기나 긴 병간호(病看護)는 그야말로 효심(孝心)으로 얼룩진 눈물의 역정(歷程)이었다. 

부모(父母) 잃은 조카 6남매(男妹)를 친자식(親子息)처럼 보살피며 알뜰히 양육(養育)해 온 그의 놀라운 정성(精誠)을 보고, 동리(洞里)사람들이 한결같이 "부처님도 저럴 순 없다."고 말할 정도(程度)로 그의 따뜻한 인간애(人間愛)는 거룩하고 아름답기만 하였다. 

비록 그는 한글조차 해독(解讀)못하는 무학자(無學者)이긴 하였지만, "공(功)든 탑(塔)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진리(眞理)를 항상(恒常) 머리 속에 그리면서, 열심(熱心)히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효부(孝婦)요 장(壯)한 아내요, 훌륭한 여성(女性)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