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이순복(李順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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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1981년 4월 11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경산군 고산면
효부(孝婦) 이순복(李順福) 54세

이순복(李順福) 여사(女史)는 부유(富裕)한 가정(家庭)의 장녀(長女)로 태어나 좋은 여건(與件)에서 서울대학교(大學校) 미술대학(美術大學)까지 졸업(卒業)하였다. 

천성(天性)이 어질고 착하면 가풍(家風)이 엄(嚴)한 친정(親庭)에서 착실(着實)하게 부덕(婦德)과 교양(敎養)을 쌓아, 28세(歲) 때 육군중령(陸軍中領)인 남편(男便)과 결혼(結婚)하였는데, 신혼생활중(新婚生活中)에 눈여겨 살펴보니 시가(媤家)의 사정(事情)이 말이 아니었다. 

내용(內容)인 즉 당시(當時) 60세(歲)인 시모(媤母)님이 중풍(中風)으로 고생(苦生)하고 있었는데, 맏아들을 비롯한 둘째, 셋째 모두가 여러 가지 사정(事情)으로 시모(媤母)님을 모실 형편(形便)이 못된다는 것을 직감적(直感的)으로 알아차렸다. 

이여사(李女史)는 이러한 딱한 사정(事情)을 홀로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가 친정부모(親庭父母)에게 못다한 효도(孝道)를 노시모(老媤母)님께 바칠 것을 결심(決心)하고, 남편(男便)을 설득(說得)하여 마침내 그의 소망(所望)을 성취(成就)하기도 했지만, 웃어른을 봉양(奉養)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최선(最善)을 다해 시모(媤母)님이 조그만 큼도 불편(不便)함이 없도록, 그의 효성(孝誠)을 알뜰히 바쳐오면서 그럭저럭 5년(年)이란 세월(歲月)이 흘렀는데, 그러던 어느 날 남편(男便)이 군복무중(軍服霧中) 부상(負傷)을 입어 제대(除隊)한다는 의외(意外)의 통보(通報)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시모(媤母)님과 남편(男便)이 괴로와할까 보아 내색(內色)도 하지 않고, 남편(男便) 대신(代身) 온갖 막노동(勞動)일에 종사(從事)하면서 노시모(老媤母)님과 남편(男便)을 봉양(奉養)하였으나, 가세(家勢)는 점점 기울어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셋째 시숙(媤叔)이 있는 경산군(慶山郡) 고산면(孤山面)에 밭 400평(坪)을 마련하여 양계(養鷄)와 양돈(養豚)을 시작하였으나, 그나마 그 일도 실패(失敗)하고 말았으니 다시 가난의 함정(陷穽)에서 헤매게 되었다. 

그 위에 85세(歲)에 이른 시모(媤母)님이 좌측골절상(左側骨折傷)으로 병상(病床)에 눕게 되어 이런저런 고통(苦痛)이 한꺼번에 겹치게 되었다. 

그 날부터 일절(一切)의 기동(起動)도 할 수 없는 시모(媤母)님의 대소변(大小便) 뒷바라지는 말할 것도 없지만, 목욕(沐浴)을 시키는 일과 환자(患者)의 짐구(寢具), 의복(衣服)의 세탁(洗濯) 등 그의 손길이 정성(精誠)스럽게 닿지 않는 곳이 단(單) 한 곳도 없을 만큼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놀라울 정도(程度)였다. 

이와 같은 이여사(李女史)의 효심(孝心)에 감동(感動)한 인근(隣近) 새마을 공장(工場)에서는 그에게 종업원(從業員) 급식(給食)일을 맡게 했고, 또한 그의 남편(男便)에게는 공장수위(工場守衛)로 채용(採用)해 주는 등의 온정(溫情)으로 비로소 새 희망(希望)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자녀(子女)들에 대한 그의 교육열(敎育熱)또한 대단했는데, 장녀(長女)는 여고(女高)를 졸업(卒業)시킨 후 출가(出稼)시켰고, 장남(長男)은 고교(高校)를 나온 후 현재(現在) 군복무중(軍服霧中)이며 차녀(次女)는 전문대학(專門大學)에, 그리고 차남(次男)은 고등학교(高等學校)에 각각 재학 중(在學中)이다. 

평소(平素) 그는 자녀(子女)들에게 "의무(義務)를 존경(尊敬)하라!"라고 하는 나폴레옹의 각언(各言)을 되새겨 주면서, 모든 일에 책임(責任)을 질 줄 아는 인간(人間)이 되라고 타이르곤 한다. 

특(特)히 이여사(李女史)는 웃어른을 존경(尊敬)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참된 마음을 지니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강조(强調)하는 엄(嚴)한 어머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