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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호(安富浩) 여사(女史)는 남편(男便)의 비뚤어진 성격(性格)탓으로 신혼초(新婚初)부터 부부(夫婦)사이가 원만(圓滿)하지 못한 채 지내오던 중, 끝내 결혼(結婚) 14년(年)만에 남편(男便)은 무정(無情)하게도 부모(父母)와 처자식(妻子息)을 팽개치고 어디론가 행방(行方)을 감추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家庭形便)에 남편(男便)마저 출가(出家)를 하자, 가세(家勢)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울어져 눈만 뜨면 끼니 걱정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외아들을 잃어버린 슬픔에 시부(媤父)님은 술로 써 세월(歲月)을 보내게 되니, 시부모(媤父母)님과 어린 4남매(男妹)를 부양(扶養)해야 하는 그의 책임(責任)은 더욱 무거워져만 같다.
그렇다고 안여사(安女史)마저 가출(家出)한 남편(男便)을 원망(怨望)하면서 매일(每日)같이 한숨만 쉴 수도 없는 형편(形便)이어서, 마음을 가다듬은 후(後) 호미와 팽이를 들고 열심(熱心)히 일하기 시작하였다.
안여사(安女史) 혼자의 힘으로 7명(名)의 식구(食口)들이 살아가기엔 너무나 벅차기만 했다.
따라서 그는 아무리 몸이 피곤(疲困)해도 가족(家族)을 위해선 참고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어쩌다가 몸이 아파서 하루라도 쉬게 되면 7명(名)의 식구(食口)들이 하루 세 끼를 굶어야 하는 딱한 처지(處地)여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터로 나가야만 했다.
때로는 지치다 못해 그 자신(自身)도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고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고 싶은 심정(心情)이 솟구칠 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차마 그는 불쌍한 노시부모(老媤父母)님과 그가 낳은 어린 4남매(男妹)를 놔 두고 그런 비정(非情)한 짓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속을 더 썩힌 것은 시부(媤父)님의 끝없는 술타령이었다.
안여사(安女史)가 눈물로 호소(呼訴)하면서 어려운 가계(家計)를 협력(協力)해서 함께 꾸려나가 보자고 간청(懇請)해 보았지만, 이미 술독에 깊이 빠져있는 시부(媤父)님을 건져 낼 수 없었다.
남편(男便)은 그를 배신(背信)하고 어디론가 행방(行方)을 감추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집에 돌아오리라는 희망(希望)을 안고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1,000 가구(家口)를 찾아가서 쌀을 얻어다가 공양(供養)을 드려 보면 당신 남편(男便) 소식(消息)을 알 수 있을 것이요."라고 말한 어느 점술가(占術家)의 말에 따라, 안여사(安女史)는 그 날부터 가가호호(家家戶戶)를 방문(訪問)해서 쌀을 얻어 모아다가 1,000가구분(家口分)이 다 되었을 때 정성(精誠)들여 공양(供養)을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의 놀라운 정성(精誠)에 감동(感動)한 탓일까, 마침내 그의 남편(男便)이 있는 곳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男便)은 이미 딴 여자(女子)와 재혼(再婚)을 하여 슬하(膝下)에 두 남매(男妹)까지 두고 있는 타인(他人)의 몸이 되고 있었다.
발길을 돌리면서 그가 마음 속으로 한 말은 다음 한 마디뿐이었다.
"내가 갈 길은 내 가정(家庭)을 잘 지키는 것뿐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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