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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명(餘名)의 식구(食口)들이 전답(田畓) 700평(坪)에 삶을 걸고 연명(延命)하고 있는,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농가(農家)에 출가(出嫁)한 윤도봉(尹道奉) 여사(女史)는,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연(漠然)하기만 했다.
그러나 전답(田畓)은 비만 오면 물에 잠겨 농사(農事)를 망치는 일이 일쑤여서, 그의 남편(男便)은 지금껏 소작(小作)에도 한 발을 걸쳐 놓고 살고 있는 그런 가난한 농부(農夫)였다.
그가 시집올 때만 해도 시조부모(媤祖父母)님과 시모(媤母)님이 모두 생존(生存)해 계셔서, 18세(歲)에 결혼(結婚)한 윤여사(尹女史)는 시집오기가 바쁘게 웃어른들을 봉양(奉養)하는 일에 더욱 신경(神經)을 써야만 했는데, 몇 년 후(年後) 시조부모(媤祖父母)님이 세상(世上)을 떠나시고 이어서 시모(媤母)님도 별세(別世)하는 바람에 그의 봉양(奉養)의 힘은 한결 줄어졌지만, 그가 34세(歲)되던 해에 이번에는 남편(男便)이 중풍(中風)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되니, 또다시 새로운 고통(苦痛)을 겪어야만 하였다.
가정(家庭)의 유일(唯一)한 대들보가 쓰러지는 바람에 당장 생활(生活)에 위협(威脅)을 받게 되어, 하는 수 없이 연약(軟弱)한 윤여사(尹女史)가 낮에는 농사(農事)일을 하고, 그리고 밤에는 품삯일과 홀치기 등으로 힘겹게 어려운 생활(生活)을 꾸려 나갔다.
이 때 시(媤)동생과 시(媤)누이들의 치닥거리도 그가 해야 할 일이어서 가사(家事)일이 벅차기만 했는데, 남편(男便)까지 눕게 되었으니 기가 막힐 수 밖에 더 있었겠는가, 그러나 남편(男便)의 건강(健康)을 되찾아 주어야겠다는 그의 집념(執念)은 대단했는데, 병석(病席)에 누운 남편(男便)이 짜증을 부리면서 불통(不通)을 토(吐)해도 그는 언제나 상냥한 미소(微笑)로 간호(看護)에 임(臨)하였다.
비록 그는 학교(學校) 문전(門前)에도 가보지 못한 무학(無學)이긴 했지만, 어릴 때부터 어깨너머로 귀담아들은 "몸을 닦는 데는 공경(恭敬)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며, 강(强)한 것을 피(避)하는 데는 순(順)한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따라서 공경(恭敬)하고 순종(順從)하는 도리(道理)는 아내가 지켜야 할 큰 예의(禮儀)이다."라는 말을 마음 속으로 되새기면서, 살얼음 위를 걸어가는 것처럼 환자(患者)인 남편(男便)을 옥(玉)이야 금(金)이야 할 만큼 정성(精誠)들여 간호(看護)하였다.
비록 일에 지치고 가난에 쫓기는 고달픈 몸이긴 했지만, 일터에서 귀가(歸家)할 때는 꼭 맛있는 음식(飮食)을 사다가 남편(男便)에게 대접(待接)했고, 때로는 뜬 눈으로 꼬박 밤을 세워 가면서 남편(男便)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람도 없이 발병(發病) 4년여(年餘)만에 남편(男便)은 타계(他界)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絶望)과 실의(失意)의 나날만을 보낼 수는 없었다.
슬픔을 박차고 일어선 윤여사(尹女史)는 더욱 분발(奮發)해서 열심(熱心)히 일을 했다.
마침내 몇 년 후(年後) 그의 힘으로 시(媤)동생과 시(媤)누이 모두를 결혼(結婚)시켜 생활(生活)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고, 그의 4남매(男妹)도 진학(進學)과 결혼(結婚) 등 이들의 진로(進路)를 개척(開拓)해 주었다.
이러한 사실(事實)이 면내(面內)에 널리 알려지자 1979년(年)에는 다산(茶山) 면경노회(面敬老會)로부터 효열상(孝烈賞)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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